20190912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는 삶 (고린도후서 4장 16-5장 10절)

어린 아기와 놀아주는 엄마들을 보면 ‘까꿍놀이’를 할 때가 있습니다. 엄마는 자신의 손이나 배게, 쿠션 같은 물건을 가지고 자신의 얼굴을 가립니다. 아직 인지 능력이 발달하지 않은 아기는 엄마가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 엄마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던 물체를 치우면서 “까꿍”하고 나타납니다. 그럼 아기가 조금 전 눈 앞에서 사라졌던 엄마가 다시 나타난 것을 보고 까르르 소리를 내며 해맑게 웃습니다. 사실 엄마는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계속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지혜가 발달하지 않은 아기가 볼 때 엄마 얼굴을 가리는 물체 때문에 엄마가 보이지 않을 뿐이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이런 유아기의 모습과 유사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고 그것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위해 사는 사람, 더 비싼 차나 집을 위해 사는 사람, 타인들로부터 얻는 존경심과 인기와 같은 명예를 위해 사는 사람,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을 위해 사는 사람 등 사람들은 이처럼 무언가 헛된 것들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는 것을 잡으려고 살아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살아갔습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은 무엇을 위해 살아간 것일까요? 먼저 16절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육체가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당해 점점 더 약해져 갈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비록 그의 겉 사람은 나이 들고 주름 들고 무릎에 힘이 빠지고, 머리 숱도 줄고, 힘도 예전 같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 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겉 사람을 소중하게 중시하며 살았습니다. 눈이 부시게 화장하고, 고급 악세사리로 치장하고, 비단 옷을 입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겉 사람이 아니라, 그의 속 사람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속 사람은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을수록 더욱 더 건강하게 성장해 갔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고후 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고난은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지만, 장차 복음을 통해 얻게 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비하면 이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는 죽을 것처럼 힘들지만, 갓 태어난 아기를 볼 때 그 모든 산통을 싹 다 잊어버림과 같이, 잠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장차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영광과 비교하면 이 고난은 아무것도 아님을 사도 바울은 고백 했습니다. 이 세상의 고난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한시적이고 잠깐 있으면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 부어주실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한 것이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잠시 후 사라질 허무한 것들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바울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 했습니다. 그가 18절에 말 합니다.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눈에 보이는 것은 어떻습니까? 잠깐 있으면 사라질 것들 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을 가만히 보니 다 허무하여 마치 바람을 잡으려 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은 잠시 있다가 조금 있으면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갔습니다.
제가 새벽예배 설교를 준비하며 “과연 사도 바울은 무슨 찬송을 불렀을까?”하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오늘 본문을 기록한 바울이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이런 가사의 찬송을 부르지 않았겠습니까? “죄 많은 이 세상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잠시 뿐인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영적 순례자들 입니다. 이 세상 살며 재산을 얼마를 가졌는지, 사회적으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위치에서 살아가는지가 우리의 가치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또한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행복을 결정하지도 못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참된 소망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 입니다. 5장 1절을 보면 바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을 ‘땅에 있는 장막 집’으로 비유했습니다. 여기서 이 집은 땅에 속한 우리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이 육체는 시간이 갈수록 늙고 병들어 나중에는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 육체는 유한하고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무너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고 선포합니다. 이 집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성도들에게 덧입혀 주시는 ‘부활의 몸’입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천국에 입성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육체의 장막이 일시적으로 거주할 곳이라면, 우리 하나님 계신 저 천국은 우리가 죽음 이후 영원히 거주하게 될 곳 입니다. 바울은 이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살아갔습니다. 비록 지금은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속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덧 입기를 소망 했습니다. 왜냐하면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누릴 기쁨과 환희는 이 땅에 썩어 없어질 것들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천국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늘나라의 기쁨을 알기에 이 땅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죄에 빠져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참 성도의 모습 입니다. 이 땅에 거하나 주님과 함께 있으나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0절 말씀대로 마지막 날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 주님은 각 사람이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상 또는 벌을 주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판주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고 또 어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당할 것입니다. 여기 계신 우리 모두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기에 이 땅에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그의 핏 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위해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