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4 (특별새벽예배 [벧엘로 돌아가라 시리즈 (5)])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창세기 35장 9-11절)

야곱은 지난 10년 간 미지근한 신앙생활 하고 살아왔습니다. 전심전력을다해 하나님을 찾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공식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맞지만, 그의 삶은 세겜 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의 가정에는 이방 신상들이 가득 했고, 그의 가족은 가나안 사람들의 문화에 젖어 하나님의 백성이란 정체성을 잊고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10 여년을 살아간 것이죠.
그러던 어느 날 찾아온 인생의 대 위기 앞에, 야곱은 부랴부랴 하나님을 다시 찾아갑니다. 지난 십년 동안 한 번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본 적도 그의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습니다. 얼마나 죄송하고 어색합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이런 나도 또 다시 받아 주실까? 과거에 나를 도와주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를 또 다시 도와 주실까?” 이런 의심과 불안을 가지고 벧엘로 올라온 야곱,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또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삶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과거에 만난 하나님을 기념하고자 그가 있던 지명을 ‘벧엘’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긴 세월의 방황 끝에도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계셨고 다시 품어 주신 하나님을 기념하기 위해 그 지명의 이름을 ‘엘벧엘’로 바꾸었습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창 35: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자, 여기 ‘다시’라는 단어에 동그라미 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야곱이 지난 10년 동안 신앙의 방황을 겪고 하나님을 멀리 했지만, 그가 또 다시 마음을 정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한 없는 자비 (헤세드) 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날 받아 주실까? 난 이미 너무 많은 죄를 지었는지도 몰라. 난 이미 세상의 더러운 떼가 너무 많이 묻어서 안 받아 주실지도 몰라.” 이러한 음성은 다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의심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오늘 야곱을 향해 ‘다시’ 나타나시고 그에게 ‘다시’ 복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다시 또 한 번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시편 106편 1절의 찬양을 기억하십시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갔어도, 오랜 세월 은혜에서 멀어져 살았어도 우리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시’ 우리를 용서 해 주시고 감싸 안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십니다.
늦은 오후 해가 지며 뒷산에 노을이 지는 시간에도, 집 나간 둘째 아들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자신의 가산을 탕진한 아들 내미 생각하며 “이 놈이 오늘은 어디서 뭘 하고 지내나. 밥은 않 굶고 잘 먹고 사나?” 앉으나 서나 아들 생각하며 처마 밑에서 이제라도 오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비록 야곱이 지난 10 여년 간 하나님 있는 둥 없는 둥 흐지부지 신앙 생활하며 세겜 사람들과 동화 되어 살아갔지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그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창 35:10)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오늘 이 본문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개명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창세기 33장 얍복강 강가에서 밤새도록 씨름하다 환도뼈가 위골 되고 얻은 이름이 ‘이스라엘’ 입니다. 이미 최소 10년 전에 주신 이름 입니다. 그런데 오늘 창세기 35장 10절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또 다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왜 이런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일까요?
야곱이 그 동안 잊고 살았거든요… 자기의 참 정체성을 잊은 채 살았던 것이죠. 10여년 만에 다시 찾은 하나님, 그리고 10여년만에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야곱아, 너가 누군지 기억하고 있니? 넌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란다!” 하고 그의 신앙의 정체성을 상기 시켜 주고 계신 것이죠.
야곱이란 이름이 어떤 뜻이 있습니까? 본래 야곱이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야곱이란 뜻이 ‘발꿈치를 잡다’는 뜻이며 이는 히브리 민족에게는 사기를 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야곱이란 이름은 사기꾼이란 뜻 입니다. 그는 말 그대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자신의 재주와 기지를 발휘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인생은 더욱 더 꼬여만 갔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야곱’이란 옛 이름을 버리고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주심으로, 그가 지난 날 살아온 옛 사람의 삶을 다 처분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세상에서 살아가나 하나님의 백성이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내가 가진 재능이나 기지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살아가는 주의 사람들 입니다. 우리가 바로 영적 이스라엘 입니다.
자, 그리고 난 후 이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평생 잊지 못할 일을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그에게 계시하신 사건이었습니다. 11절 보십시오. “(창 35: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이미 하나님은 창세기 28장과 32장에 각각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은 이전의 모든 경험을 능가하는 축복입니다. 진정한 영적 회복은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자신을 소개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샤다드’란 말은 ‘어떤 사물을 힘 있게 다룬다.’는 뜻이 있습니다.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께서 다루시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큰 산과 같은 문제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 톨의 먼지 같을 뿐 입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 삶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게 되고, 산과 같이 크게 느껴지던 문제들도, 눈과 같이 녹아 내립니다. 또한 ‘샤다드’란 단어에는 ‘힘 있는 용사’란 뜻도 있습니다. 우리 중 그 누가 세상과 대적하여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늘 세상 앞에서 작아지고,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일 뿐 입니다. 그러나 우리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 힘 있는 용사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신다면 누가 감히 우리의 적수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만일 야곱이 지난 날 청년의 때에 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면 별로 감흥이 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젊은 시절 부모 곁을 떠나 나 홀로 타지로 떠나가던 그 날부터 20년이 흘러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돌아온 야곱… 지나갔던 무수한 사건들과 상황들을 돌아보니, 삼촌 라반에게 10번 이상 사기도 당했고, 들판에서 양을 치다 늑대나 곰에게 죽을 뻔도 한 것도 수 차례였습니다. 과거에 겪었던 환난들이 주마 듯 지나치며 야곱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인도해 오시고 보호해 주신 분이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의 한 없는 자비와 은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곱처럼 주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 분은 엘 샤다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모든 상황을 이기게 하시는 강한 용사 전능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그리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그리하신 것처럼 반드시 우리 삶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