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3 (특별새벽예배 [벧엘로 돌아가라 시리즈 (4)]) 과거에 만난 하나님을 다시 만나다 (창세기 35장 7절)

야곱은 젊은 날 자신을 죽이려고 한 형 에서를 피해 하란 땅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평생 한 번도 집 밖을 떠나 본 적 없던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야곱의 인생에 첫 고난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죠. 아는 사람도 없고, 손에 지도 한 장 없고, 내일은 무엇이 또 날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고, 악한 패거리를 만나 사기를 당하거나 몽둥이 찜질을 당할 수도 있으니 야곱이 노정 중에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돌을 베개 삼아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그는 꿈에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깨닫고 그 지역을 ‘하나님의 집’이란 뜻을 가진 ‘벧엘’이라 지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자신이 더 이상 혼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곱 곁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20 여년이 지난 지금 과거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로 청년으로 얍복강을 건너 갔던 야곱은 이제 두 아내와 열두 아들을 거느리고 수 많은 가축을 거느린 거부가 되어 고향 땅에 돌아 왔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 에서와도 화해를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다 완벽한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또 다시 그의 인생에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한 순간에 그는 사방에 적들로 둘러 쌓이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칫 잘 못하면 평생 쌓아온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그 자신과 가족의 목숨도 보장하지 못할 만큼 큰 위기에 둘러 쌓인 것이죠.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야곱은 그의 가족과 식솔들을 데리고 드디어 벧엘에 올라갑니다.
오늘 본문은 벧엘에 올라간 야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벧엘에 도착한 야곱에 대한 기록을 다시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창 35: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겜 땅을 떠나 벧엘에 이르렀고 그곳에 단을 쌓았습니다. 야곱이 세겜을 떠났다는 것은 이전에 즐기던 세상 죄를 떠났음을 의미합니다. 벧엘에 단을 쌓았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예배가 회복되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다시 서 있음을 의미합니다. 잠자던 야곱의 영혼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여전히 그 안에 씻어야 하고 끊어내야 하는 죄가 가득함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이 모든 환난 가운데 자신을 도와줄 하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찾았습니다. 야곱의 삶에서 영적 각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 단을 쌓고 그가 거한 땅의 지명을 다시 한 번 바꾸었습니다. 새 지명의 바로 ‘엘벧엘’ 입니다. 해석하면 ‘벧엘의 하나님’ 입니다. 오늘 7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35: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본문을 한국어 성경으로 읽으면 이 말씀이 야곱의 과거적 회상으로 이해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이 곳을 엘벧엘이라 부른 이유가 야곱이 이전에 형 에서를 피할 때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듯한 과거적인 고백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는 본래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야곱이 지금 이 장소를 엘벧엘이라고 고쳐서 부른 이유는 이전에 자신의 환난 날에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또 다시 그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현재적인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전에 우리 형 에서의 낯을 피할 때도 이곳에서 나타나셨더니, 이제 또 내가 인생의 환난을 피해 이곳에 올라와 단을 쌓자, 하나님께서 또 다시 나타나 주셨구나” 하고 현재 자신의 삶에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7절 말씀은 과거의 은혜를 추억하며 이야기하고 잇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의 삶에 다시 나타나셔서 새로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향한 고백 입니다.
과거의 어느 날, 내가 힘들어 외롭고 눈물 흘릴 때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아 인생의 위기를 벗어난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시고 이제 다시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 주셔서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환난 가운데서도 능히 구원하실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 하시기 때문 입니다. 과거에도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내일도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여기 한글 성경에는 한 가지 빠진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그 앞에 정관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을 다시 해석하면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그 하나님’ 입니다. 물론 성경을 해석할 때 정관사를 생략하는 것은 흔한 일 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만큼은 이것을 넘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엘로힘)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가 오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 하나님’이란 무슨 뜻일까요? 야곱이 그 동안 잊고 살아왔던 하나님 입니다. 비록 야곱은 잊고 있었지만, 그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해 오신 언약을 야곱의 삶을 통하여 신실하게 성취해 가고 계셨던 바로 ‘그 하나님’ 입니다. 나그네처럼 정처 없이 사는 인생인지 알았는데 신실하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야곱을 인도하고 계셨던 바로 ‘그 하나님’ 입니다. 따라서 오늘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가 하나님 앞에 정관사를 붙여 ‘그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신실하신 하나님, 그가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가 영적으로 어떤 복을 약속 받았는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언약의 참 의미가 무어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평생토록 야곱의 삶 가운데 신실하게 역사하심으로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삶의 위기 속에서 야곱은 하나님께서 실수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왜 이런 불행한 일들이 자꾸만 나에게 생깁니까? 하나님 나를 잊으셨습니까? 하나님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고백은 그 불신앙을 깨트리는 고백 입니다. “아니구나? 그 하나님, 과거에 나와 언약을 맺으셨던 그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잊으신 적이 없으셨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시구나? 한 번도 나를 버리거나 떠난 적이 없으시고 내 삶을 지금까지도 붙들고 계셨구나?” 이러한 영적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입니까? 혹시 빛 바랜 일기장처럼 지나 온 오랜 시절 전에 만난 하나님은 아닙니까? 야곱이 경험한 것처럼, 우리는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하심은 언제나 동일 하십니다. 과거에 우리를 도우셨던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지금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앞으로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지금도 내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고 내 곁에서 나의 오른손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지난 날 힘들고 어려운 시절 주님께 불렀던 찬양이 있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우리 주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주를 전심으로 찾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마침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