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0 하나님 앞에 진실함으로 나아가려면 (민수기 22장 15-20절)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신하들을 보내어 술사 발람을 불러오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이 보낸 사람들을 따라가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 하지도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에 발람은 왕이 보낸 사람들을 돌려 보냈습니다. 그러나 모압 왕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어 발람이 오도록 설득하게 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더 좋은 제안을 가지고 왔습니다. 충분한 보수를 약속하고 그가 원하는 소원도 다 들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습니다. 16-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민 22:16) 그들이 발람에게로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십볼의 아들 발락의 말씀에 청컨대 아무 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민 22:17)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모압 왕은 발람에게 이곳에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주기만 한다면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세상에 부귀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발람도 이러한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만, 발람은 결국 이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뜻에 어긋난 행동을 함으로써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오르고, 세상의 많은 부를 거느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밀물이 들어오는 바닷가에서 모래로 성을 쌓는 것 같고, 꿈 속에서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무리 좋아 보여도 결국은 곧 무너질 것들이며 사라질 것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서를 보니 사단이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세 가지 시험을 하는데 그 중 사탄이 예수님을 높은 산꼭대기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내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사단이 사람을 시험하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부귀영화는 사단이 신자를 유혹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강력한 방법입니다. 자신을 유혹하는 사단에게 예수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단호 하셨습니다. “세상 나라와 그 영광을 준다 해도 하나님을 버릴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겠노라.” 주님 말씀하신 것이죠.
발람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이 사람들을 따라가지 말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이 사람들을 따라 간다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처음에 발람은 이 유혹을 잘 이기어 낸 것처럼 보입니다.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민 22:18)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발람은 하나님의 주신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발람이 이 말대로 행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 말은 진심이 아닌 거짓 위선에 불과 했습니다. 발람의 말을 들어보면 충실한 선지자처럼 보이지만, 19절에 가서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번복 시키려 합니다. 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민 22:19)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 보리라” 발람은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는 것,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 입니다. 그런데 왜 발람이 이 사람들에게 하룻밤 묵으면서 기다리라고 말합니까? 재물과 권세를 준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거든요. 평생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너무 좋은 기회인데 이 기회를 놓치면 아깝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한 데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정말 안 가는 게 맞습니까?”하고 물음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이루려고 한 의도를 다분히 볼 수 있습니다. 발람처럼 세상 재물과 지위에 눈이 돌아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 재물과 지위를 멸시할 수 있는 사람은 선한 양심을 지키고 살 수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꼐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발람은 달콤한 재물의 제안에 마음이 동요 되어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자기 생각대로 해 주시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갖게 된 것이죠.
옛날 한국 동네에는 이따금씩 엿장수들이 손에 엿장수 가위를 들고 나타납니다. 그리곤 동네 골목길에서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조그마한 엿 조각을 나눠줍니다. 엿을 주며 아이들에게 ‘집에 있는 쓸모없는 물건’을 가지고 오면 자기가 더 큰 엿 조각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이야 사탕, 초콜렛, 과자 같이 먹을게 많지만 옛날에 한국에서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아이들이 엿의 달콤한 맛을 보니까 완전 신세계거든요? 입에서 사르르 녹는 달콤한 엿을 더 맛보기 위해서 아이들이 집에 달려가서 하나 둘 집안 살림을 가지고 옵니다. 빈 맥주병, 종이, 솜 뭉텅이, 찢어진 고무신… 할아버지가 담배 피려고 처마 밑에 놔두신 성냥갑 다 사라지는 거에요. 그 중에서 엿장수들이 제일 좋아하는게 뭐에요? ‘고철’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그 달콤함에 눈이 돌아가니까 집에 가서 할아버지 요강 가지고 오고, 부엌에서 엄마 몰래 주전자 가지고 가고… 한참 가발 사업이 시작하던 때는 머리카락도 팔고 그랬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죄의 달콤함에 취해 버리면, 그 죄가 주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내어놓는 거에요. 하나님은 분명 발람에게 모압 사람들 따라가지 말라고 말씀 하셨거든요? 그런데 발람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회가 보통 기회가 아니었어요.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복권 당첨과도 같은 기회였어요. 결국 어떻게 됩니까? 부귀영화에 눈이 먼 이 사람은 불의의 삯을 위해서 길을 떠나게 됩니다. 죄로 물든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 봅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내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도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말씀을 못 들은 채 하고 있는 삶의 영역은 없습니까? 겉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도 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죄의 유혹은 말씀보다 더 달콤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욕망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 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말씀이 아닌 재물을 선택한 발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게 됩니다.
혹시 발람과 같이 현재 우리가 받고 있는 달콤한 죄의 유혹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이미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까? 아무리 좋아 보이는 천재일우의 기회라 할지라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원리에 위배되고, 우리 마음 속 양심에 어긋나는 결정들은 죄 입니다.
죄의 유혹으로부터 흔들리지 마시고 단호하게 죄를 이기십시오. 마음 속 욕망을 버리고, 세상의 달콤한 재물에 눈이 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삶이 아니라, 어떤 큰 손해를 봐야 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