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0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한 제자들 (마가복음 15장 40절 -47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던 바로 날 골고다 언덕에는 멀리서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40절을 보면 그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질병의 고침을 받은 자들, 예수님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그를 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이 워낙 잔인하다 보니 가까이서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고 멀리서나마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던 것이죠.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본래 일곱 귀신에 들렸던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완전한 치유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예수님을 따르는 자였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나 사람이 바로 이 막달라 마리아 입니다. 40절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라는 인물도 멀리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야고보’란 이름을 가진 제자가 두 명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말합니다. 40절에 ‘살로메’란 여인도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요,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의 출세를 청탁하던 바로 그 여인입니다. 성경은 이 여인들에 대하여 그들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 그를 따르던 자들이며, 예수님을 섬기던 여인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 외에도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따른 많은 여성 제자들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훗날 이 여인들은 초대 교회를 이루는 핵심 구성원이 되어 교회의 부흥의 불씨가 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금요일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다음 날은 토요일은 안식일 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상 안식일에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하루 전날 안식일 준수를 위하여 면밀하게 준비합니다. 따라서 날이 저물어 가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에게 찾아가 안식일이 되기전 예수님의 시신를 장사할 수 있도록 요청합니다. 그런데 43절에 보면 그가 ‘당돌히’ 요청했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본래 일반적으로 사형에 처해진 죽은 죄수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형은 다릅니다. 십자가형은 반역법으로 인해 처형된 죄수이기 때문에 시신을 주는 것조차 잘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문헌을 보면 십자가형에 처해 죽은 죄수의 경우, 가족들도 공범자로 오해 받을 소지가 많아 시신을 거두기를 꺼려했습니다. 당시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의 시신은 보통 길바닥이나 들에 버려져 방치 되어 새들 혹은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가족도 아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십자가형에 처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 입니다. 로마 정부에 눈 밖에 나면 한 순간에 반역 죄인으로 찍혀 평생 쌓아온 재산, 명예, 지위 심지어 생명까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게다가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 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한 일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한 심판을 한 동료 공회원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 찍힐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공회원 중에서도 존경 받는 사람이었고 매우 명망 있고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동료 공회원들로부터 한 순간에 미움 받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이 모든 위험을 이겨내고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 했습니다.
어떻게 아리마대 요셉은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자신이 평생 쌓아온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는 이 상황에서도 당돌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러 갈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마태복음 27장 57절에 그의 행동 근거를 알 수 있는 강력한 단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빼앗기는 위험이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제자였기에 그는 믿음과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지난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12명의 제자 중 한 사람도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 도망치지 바빴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도 신앙인의 의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리마대의 요청을 들은 빌라도는 의아해 했습니다. 보통 십자가형을 받은 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당일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 십자가 지시기도 전에 이미 포악스러운 로마 군인들에게 모진 채찍질과 매질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불과 6기나 만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빌라도의 이러한 반응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이었는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한 빌라도는 아리마대 요셉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주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에 싸서 무덤에 안치 해 두었습니다. 야생 짐승이나 도굴꾼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무덤 입구를 큰 돌로 막아 두었습니다. 47절을 보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는 이 현장에도 열 두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만이 예수님의 시신 둔 곳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도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눕히는지 그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죠.
진실한 성도는 주님이 어디 계시든지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현장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는 현장에는 얼마 안 되는 여 제자들과 제자 한 두 사람만 있었습니다. 혹시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며 내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지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에 있어서 눈 앞의 이해 득실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기에 예수님께로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끝까지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님이 계신 곳을 따라가면, 그곳이 무덤일지라도 생명의 무덤이 되고, 부활의 무덤, 승리의 무덤이 됩니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과 부활의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가는 참된 제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