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9 인내하고 감당해야 할 십자가 사명 (마가복음 15장 21절 -32절)


로마 병사들에게 매질 당하신 예수님은 온 몸이 피 멍이 들었습니다. 채찍질 당하신 주님의 몸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곁에서 지켜 보았다면 고통스러워 하시는 주님의 몸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선명한 피를 보았을 것입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죄수는 자신이 달려 죽게 될 나무를 직접 들고 형이 집행 되는 장소까지 가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게 될 장소는 ‘해골’ 혹은 ‘두개골’이란 뜻을 가진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골고다는 아람어인데, 나중에 성경학자들이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할 때 이 ‘골고다’란 단어를 ‘Calvaria’ 우리가 아는 ‘갈보리’라고 번역 했습니다. ‘골고다’와 ‘갈보리’는 같은 곳 입니다.
한 사람의 성년이 수 시간 매달려 있어도 부러지지 않을만큼 단단한 나무였으니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그러나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가 어른 한 사람이 못 들고 갈 정도로 무거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문 즈음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만큼 지쳐 계셨습니다. 간밤에 한 숨도 못 주무시고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뚝뚝 떨어지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셨어요. 병사들에게 체포된 이후에도 쉼 없이 여기저기 붙들려가 심문을 당하시고 병사들에게 매질 당하셨습니다.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가실 힘이 남아 있질 않으신 거죠.
더 이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로마 병사들은 구경꾼들 사이에 끼어 있던 남성을 하나 지목하여 그로 하여금 예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 입니다. 그는 본래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이 아니고 멀리 떨어진 북아프리카의 구레네라는 도시에소 온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최대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그는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뜻 밖에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을 보면 마가는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후, 구레네 시몬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 교회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시몬의 아내, 알렉산더와 루포의 어머니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내 어머니’라고 부를 만큼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아버지 구레네 시몬이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해 억지로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진 것이 오히려 자녀들에게는 믿음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시몬은 자신이 억지로 지고 간 십자가가 자신과 그의 온 가족을 구원하는 생명의 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참 신비한 방법으로 시몬의 가정을 구원하신 것이죠
23절에 보니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글 성경으로는 알 수 없지만,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의 입에 몰약을 탄 포도주를 넣기 위해 시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몰약은 마취 성분이 강한 약재 입니다. 따라서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제공하는 이유는 십자가의 고통이 극심하기에 그 고통을 감소하기 위해 주는 것이죠. 마태복음에 보면 ‘몰약을 탄 포도주’가 ‘쓸개 탄 포도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69편에 보면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의 병사들이 예수님께 쓸개 탄 포도주를 줌으로 인해 메시아를 가리키는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이죠.
비록 로마 병사들이 ‘몰약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무감각하게 하는 몰약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온전히 당하셨어요. 로마 병사들은 구레네 시몬이 들고 온 바로 그 나무 십자가 위에 예수님을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는 죄수가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벌거벗기고 매답니다. 십자가형에 처하는 죄수들이 입고 있던 옷은 사형 집행자들의 부수입이었어요. 이에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께서 입고 있던 겉옷 즉 예수님이 신고 계셨던 신발, 두건, 허리띠 및 몸에 두르고 계신 천 등을 나누어 가졌어요. 그런데 병사들이 예수님의 속옷을 보니 이것은 통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 옷을 보면 정장 바지처럼 천 조각이 만나는 곳에 바느질 한 자국이 있는 옷이 있는가 하면, 목도리처럼 아예 통으로 짜는 옷이 있잖아요? 우리나라 전통 삼베 옷도 통으로 짜죠? 예수님이 입고 계셨던 속옷은 애초에 옷감을 짤 때 통으로 짠 옷이었습니다. (It was a seemless garment.) 그러니까 로마 병사들이 보니까 찢어서 나누어 갖는 것 보다는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 더 좋아 보이는 거죠. 결국 이 속옷을 두고 누가 가질 것인가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한 구약성경의 성취였습니다. 시편 22편 1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바로 앞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던 제자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요한복음에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25절 보니까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시간이 제 삼시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시간을 현대인의 시간으로 이해하려면 더하기 6하면 됩니다. 제 삼시는 몇시 입니까? 오전 아홉시 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때 못 박히셨어요. 로마 제국은 십자가형과 같은 끔찍한 형벌을 당하는 죄수들이 무슨 죄목으로 죽는 지 팻말로 죄를 적어 죄수들의 목에 걸거나 머리 위 나무판에 붙여 놓았습니다. 식민지에 사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럽게 죽고 있는 죄수들을 보며, 겁에 질려 똑같은 반역죄나 선동죄를 짓지 못하도록 공포 정치를 한 것이죠. 이와 같은 사유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에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된 원인, 범죄의 내용을 적어야 했습니다. 죄수의 죄목에 들어갈 내용은 심판을 내린 재판장이 결정합니다. 이 경우에는 예수님께 사형 심판을 내린 본디오 빌라도가 결정하는 거죠. 26절 말씀을 보니까 빌라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죄목을 적는 명패에 뭐라고 적었습니까?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습니다. 실제로 이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한 요한은 요한복음에 그 날 명패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문구를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는 말로 거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병사들에게 맞은 온 몸에 피멍이 들고, 채찍질로 인해 살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자, 그 앞에 서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모욕하기 시작 했습니다. 29절-30절 보세요. “(막 15: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막 15: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유대인들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 머리를 흔들며 비웃으며 예수님을 조롱 했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네가 스스로 성전도 3일만에 지을 만큼 능력이 있는 자라고 하면서 그깟 십자가의 못은 왜 빼내지 못하느냐! 네 말이 거짓이고 허풍이었구나!”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의 조롱소리였어요. 제가 지금 하는 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입에 담기 힘든 말들도 예수님께 서슴없이 던졌을 것입니다. 이들 곁에 서 있던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을 조롱 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지휘의 고하를 막론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희롱하고 조롱하고 있는 거죠. “남을 구원한다더니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여,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겠다.” 32절 후반절을 보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들도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두 강도가 예수님을 욕했다고 기록한 것은 마가복음 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은 두 강도 중 한 사람만 욕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인도될 약속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처음에는 두 강도 모두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은 한 강도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 것이라면 결코 두 본문은 모순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몰약을 탄 포도주마저 거부하며 철저하게 십자가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벌거벗겨지는 수치를 당하시며 사람들에게 모욕과 조롱을 당하시며 고통스럽게 죽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 모든 수난이 바로 우리들을 대신해서 받으신 죄값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죽으심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로마서 5장 8-10절 말씀을 함께 찾아 읽겠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보여주는 사랑의 확실한 증거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해 모욕과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언제라도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실 수 있으셨지만, 그리하면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없기에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우리를 위해 끝까지 참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과 수치를 끝까지 참으시면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주 예수를 위해 사랑과 인내로 주님을 끝까지 섬기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