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 반 동안 함께 해온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은 한 밤중에 병사들에게 잡혀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만장일치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는 것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스라엘 최고 의결기관인 공회라도 실제로 사형 집행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공회가 사형 판결을 내렸다 하더라도 자기들 마음대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없던 것이죠. 그 이유는 로마 제국이 사형 집행 권한을 식민지를 다스리는 총독에게 주어 유대인들이 독자적으로 사람을 사형을 행사할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날이 밝자마자, 유대 지도자들은 당시 유대 지역을 다스리도록 로마제국이 임명한 제 5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빌라도는 많은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아침 일찍부터 웬 30대 초반의 남자 청년을 사형에 처하기 위해 이처럼 구름 때 같이 많이 몰려 온 사실에 깊은 흥미를 갖게 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재판 자리에 앉은 빌라도에게 예수가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거짓 누명을 씌우기도 했고, 율법을 어기고 신성모독을 했다는 등 여러가지 불리한 거짓 증언들로 예수님을 고발 했습니다.
본래 피의자의 신분에 있는 자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억울한 누명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재판소의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방에서 저를 잡아 죽이기 위해 극악스럽게 예수를 비방하는 유대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예수님은 아무런 항변도, 변명도 없이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죄인인 우리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잠잠히 유죄 판결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죠.
마침 예수님께서 잡혀 오신 날은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유대민족 최대의 축제 입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식민지에 부임해 온 총독은 자기가 관할하고 있는 죄인을 풀어 줄 수 있는 사면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대인의 대 축제 기간인 유월절에 한 사람의 죄수를 풀어주는 방법으로 죄수 사면권을 시행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광복절 특사’가 있듯이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 특사’가 있는 셈이죠.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 특사의 후보로 두 사람을 이야기 합니다. 한 사람은 신성모독 죄로 잡혀 오신 나사렛 예수 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바라바라 하는 죄수 였습니다. 7절을 보면 그가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잡혀온 사람입니다. 여기서 민란이란 이 당시 유대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로마 제국에 불만을 품은 유대인들이 일으킨 폭동을 말합니다. 바라바는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된 유대 독립 운동가 또는 혁명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바라바에 대해서 ‘유명한 죄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바’를 알고 정도로 그는 잘 알려진 죄수였습니다.
군중들은 한 때 메시아로서 기대했던 예수님에게서 더 이상 메시아로서의 흔적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자 큰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비록 사람을 죽였으나 로마 제국으로부터 유대 민족을 해방하기 위하여 힘쓴 바라바에게 더 큰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9절에 빌라도가 유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본디오 빌라도가 유월절 특사의 후보로 예수님과 바라바 두 사람을 고른 이유는 분명합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이 유월절 특사로 예수님을 고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내심 예수를 풀어주려고 하는 것이죠. 그것도 그럴 것이 10절 말씀대로 그 자신이 볼 때 지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고발하는 것은 ‘시기심’에 의한 거짓 고발이라는 것을 너무도 명확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빌라도의 아내 클라우디아가 전날 밤 자신의 꿈자리가 심상치 않았다며 예수님을 석방해줄 것을 남편인 빌라도에게 당부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기대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유월절 특사로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선택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에 의해 동원된 사람들, 돈으로 매수 된 사람들, 대제사장의 하인들, 그리고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불경건한 자들,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던 모든 이들이 결국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유월절 특사로 풀어줄 것을 요청 했습니다.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유대인들이 유월절 특사로 ‘바라바’를 고르자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할 것인지, 처벌할 것인지 군중에게 견해를 물어 보았습니다. 12절 보세요. “(막 15: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빌라도는 자신이 가진 권한과 로마법에 따라 얼마든지 예수님에게 무죄를 선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지역의 최고 총독입니다. 이 당시 행정과 사법을 통틀어 본디오 빌라도 보다 높은 자는 없었습니다. 그 자신 역시 예수가 무죄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심의 소리보다 무리들의 판결에 따르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예루살렘 성에 모인 커다란 무리는 크게 소리질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해달라고 요청 했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 시대에 행해지던 가장 극악무도한 처벌법이었습니다. 너무나 잔인한 형벌이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국민에게는 사용하지 않았고, 오로지 노예들 혹은 반역자들에게만 사용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고자 했으나, 무리들은 더 큰 목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고 호소 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역의 제 5대 총독 입니다. 비록 그가 총독이지만, 이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이 로마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그가 사태의 총 책임을 지고 총독의 지위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미 거짓 증인들이 예수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고 고발 했습니다. 이 당시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왕은 ‘헤롯’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러한 정치적인 반역을 시도 했는데도 그를 놓아준다면 빌라도에게도 책임이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못 박으라는 유대인들의 언성을 이기지 못한 빌라도는 죄수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에게 십자가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십자가형은 십자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온 몸에서 피가 떨어질 정도로 심한 매질을 당해야 합니다. 온 몸의 살이 찢어지도록 채찍질을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 나무를 집적 매고 처형장까지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매로 맞으셨는지, 채찍에 의해 얼마나 살이 갈기갈기 찢기셨는지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실 힘도 없으셨습니다.
15절 보시겠습니까? “(막 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이 때 이미 예수님의 온 몸은 피로 멍이 들고, 여기저기 살이 찢어지고, 머리부터 발 끝까지 피투성이로 계신 것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로마 병사들의 예상 시간보다 더 일찍 숨을 거두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당시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가혹하게 때렸고, 얼마나 비참하게 그의 살을 채찍으로 갈기갈기 찢어 놓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심한 몽둥이 매질과 채찍질로 인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당하신 것이죠.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을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곳은 로마 총독의 군사들이 머무는 군 본부요 ‘막사’ 였습니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이 당시 염색 기술로 볼 때 자색은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옷으로 왕이나 총독 같은 높은 지위의 사람들만 입었습니다. 아마도 병사들은 총독 빌라도가 입다가 버린 넝마 조각을 예수님께 입힌 것으로 보입니다. 병사들이 온 몸에 피 멍이 든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거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우리가 너를 왕처럼 입혀주마! 왕이니까 왕관도 필요하지?” 병사들은 예수님에게 씌울 면류관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사용한 것은 ‘아칸디논’이라는 식물로서 질긴 줄기를 가지고 뾰족하고 강한 가시들이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그 가시를 왕이 쓰는 왕관 모양으로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병사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손에 왕이 가지고 있는 지휘봉인 ‘홀’을 대신해서 ‘갈대’까지 그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조롱하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십시오!’하고 비꼬는 듯한 어투로 인사했습니다. 예수님을 왕처럼 분장시킨 후 이러한 행동을 취함으로 그에게 모멸감을 주고자 했던 것이죠. 한참 예수님을 조롱한 병사들은 그의 손에 쥐어 준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강하게 때렸습니다. 예수님께 침을 뱉고 다시 그 앞에 왕을 섬기듯이 무릎 꿇고 절하며 그를 조롱 했습니다. 우리는 19절 짧은 구절을 통해 이 본문을 읽습니다. 19절 읽은 데 10초도 안 걸립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이 모욕과 모독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병사들에게 갖은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저항 한 번 하시지 않고 다 참으셨습니다.
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연약하게 아무런 저항도 없이 온 몸에 매를 맞으시고, 채찍질 당하며 살을 찢으셔야 했을까요? 왜 예수님은 이처럼 저 로마 병사들에게 조롱과 모멸을 당하시면서도 끝까지 저항하지 않으시고 참아야 하셨을까요?
저는 오늘 설교의 결론을 성경에서 찾고자 합니다. 이 결론은 그의 십자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본 제자 베드로의 고백 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0-25절 말씀을 찾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벧전 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왜 예수님은 매질 당하시고 채찍질 당하시고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습니까? 24절 보십시오.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해 고난 당하셨습니다. 죄인인 저와 여러분을 살리시기 위해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치유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받으신 고난이 우리를 위한 용서와 치유와 구원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위해 고통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감사하며 그 사랑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이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