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7 믿음의 길을 걷다가 고난을 만나면 (마가복음 14장 66절 -72절)

배신자 가룟 유다가 검과 몽둥이를 든 병사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아가자, 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 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큼은 끝까지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 했던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정신없이 도망가던 베드로는, 잠시 후에 발 길을 돌려 예수님과 병사들을 멀리서 조심스레 좇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관사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동안 베드로는 관사의 뒤뜰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 기온이 떨어지자 추운 몸을 녹이기 위해 하인 몇 사람들이 불을 피워놓고 모여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자연스럽게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들어왔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일하는 여종으로 낯선 남자가 하인들 틈에 끼어 불을 쬐고 있는 모습을 보자, 전에 어디선가 본 듯하여 그를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어린 여종은 곧 베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당신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깊고 컴컴한 밤이라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베드로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지금 분위기가 험악 합니다. 좀 전에 예수님께서 사형 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제사장의 하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주먹으로 때리고, 침 뱉고, 욕하고, 뺨으로 그를 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베드로가 서 있는 곳은 예수님께서 재판 받고 계신 곳과 떨어진 뒤뜰이었으나,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눈이 마주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로 눈이 마주칠 만큼 가까운 거죠. 지금 눈 앞에 계신 예수님도 저렇게 잡아 죽이려고 사람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데, 자신이 예수의 추종자요, 수제자인 것이 발각된다면 목숨이 어찌 될 지 장담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이 어린 여종이 “당신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하고 물어보았으니 베드로가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당황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 합니다. 6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막 14:68)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너도 저 나사렛 예수와 한 패지?”하고 묻는 여종에게 “무슨 소리냐? 나는 너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볼까 얼른 자리를 피했습니다.
69절에 나오는 ‘비자’는 앞서 나온 바로 그 동일한 ‘여종’입니다. 베드로가 자리를 떠서 도망가니까 이 여종이 베드로를 따라와서 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베드로가 예수님과 한패라는 것을 고발합니다. 69절 보세요. “(막 14:69) 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처음 물어봤을 때는 베드로에게 “당신 예수와 함께 있었죠?” 하고 물어봤는데, 두번째는 “이 사람이 예수와 한패가 확실하다!”하고 확신을 가지고 추궁하니, 베드로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 더 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는 또 다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70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나 모른다니까.”하고 한 번 부인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보면 지금 베드로는 “난 저 예수인가 하는 사람 모른다니까? 진짜 몰라.”하고 계속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다급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예수님과 자신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철저하게 부인한 거죠.
그러자 이제는 그의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7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막 14: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지금 이들이 있는 곳은 대제사장의 관사가 있는 예루살렘 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가버나움 사람입니다. 우리나라도 서울 사람, 부산 사람은 말하는 것만 들어봐도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도 지역마다 말에 억양이 있어, “쌀”이란 한 글자만 들어도 들어도 “저 사람 경상도 사투리 쓰는구만?”하고 알 수 있잖아요? 사람들이 베드로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갈릴리 사람인 것을 바로 케치한 거죠. “당신 말투를 보아하니 갈릴리 사람이 맞구만? 당신도 분명히 저 예수와 한패임에 들림없어!” 아까는 어린 여자 종 하나가 추궁했는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고 추궁하자 베드로는 다급해진 나머지 강도를 높여 말했습니다. 7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막 14:71)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다급해진 베드로는 급기야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저주의 맹세까지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도 예수님처럼 병사들에게 붙잡혀가 사형에 처해 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제자는 다 예수님을 버려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 했던 베드로 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을 조금만 위로 거슬러 올라가 마가복음 14장 27-3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막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막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막 14: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막 14: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31절에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막 14: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그러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또 부인하고, 예수와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저주하고 맹세하여 부인 했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닭의 두 번째 울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72절 말씀 입니다. “(막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닭 울음 소리를 듣자 그제서야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관사를 뛰쳐나가 심히 통곡 했습니다. 지난 3년반 동안 따르고 가족처럼 지낸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비겁한 것인지 베드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자책의 눈물이요, 안타까움의 눈물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배신 했다는 후회와 회개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하인들 앞에서 두려움에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그의 모습은 혹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보다, 예수님을 모른 채 세상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드로는 사람들의 고발에 흔들려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고발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믿음으로 당당하셨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들을 두려움과 염려로 흔들려 할 것입니다. 혹시 지금 베드로처럼 고난 앞에 흔들리며 쓰러지셨습니까? 다시 십자가 앞에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십시오. 자신을 부인한 제자 베드로를 주님은 찾아오시고 또 다시 회복 시켜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넘어진 우리들이라도 또 다시 믿음으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공격에 흔들리며 믿음을 저버리지 마시고, 예수님처럼 고난과 두려움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오늘 이 하루를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