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속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와 감람산이라는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감람산’이라는 단어를 요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올리브산’ 입니다. 올리브 열매가 많이 자라나는 곳이었죠. 올리브 열매를 이용하여 기름을 짜내던 곳이 바로 ‘겟세마네’ 입니다. ‘겟세마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기름을 짜내는 곳’이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도 이곳 겟세마네 동산에 오셔서 여러 차례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기도는 평상시와 달랐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드리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틀을 사용하여 올리브 열매를 짓눌러 기름을 짜내듯이, 예수님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땅에 뚝뚝 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전 먼저 열 두 제자를 겟세마네에 머물게 하시고, 그 중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을 데리고 따로 함께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가 일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열두 제자 중에 바로 이 세 사람이 예수님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Inner Circle Member 들 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심혈을 귀울이셔서 제자양육을 한 사람들인 셈이죠.
33절에 이 세 사람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두 가지 단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이 중 ‘심히 놀랐다”라는 이 단어는 마태복음 26장 37절에서는 ‘고민하다’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눈 앞에 두시고 매우 큰 심적 고통을 가지고 계셨음을 보여줍니다. 슬퍼하셨다는 것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 될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슬퍼하며 근심에 빠지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복음서를 통틀어 예수님께서 이처럼 연약해 보이는 장면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느끼셨던 예수님의 고민과 슬픔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 집니다. 3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막 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온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에게 커다란 고통과 번민을 가지고 올만큼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주간의 목요일 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제 곧 날이 밝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34절에 “심히 고민하여”라는 말은 어떤 중대한 결정 사항을 목전에 두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심각하게 갈등하는 마음의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 입니다. 거기에 슬픔과 고통의 감정까지 더해져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예수님꼐서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계신 예수님께서 이 정도의 큰 고통과 근심의 감정을 가지셨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센 파도를 잠재우고, 폭풍우를 멈추게 하신 분이십니다. 물 위를 걸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아주 본문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의 인간처럼 연약하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계셨을까?” 만일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이 두려워서 벌벌 떨고 계신 것이고, 이 문제를 이겨낼 힘과 능력이 없으셔서 심히 근심하고 계신 것이라면, 우리는 이런 연약한 메시아를 구원자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 십자가를 앞에 두고 크게 근심하고 계신 모습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처럼 연약한 모습으로 근심하고 계시고 고통과 불안 속에 처해야 하셨을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갖게 되는 물음의 해답은 성경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다 함께 히브리서 2장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17절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일에 ‘형제들과’ 즉 우리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과 같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시며 인간이 느끼는 불안, 근심, 고민, 염려,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 연약한 인간이 겪는 고민이 란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너무 잘 아세요. 염려, 슬픔, 갈등, 아픔 예수님도 몸소 다 체험하셨어요.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의 아픔과 눈물을 보실 때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보시고 “제네들 힘들겠네… 내가 도와줘야겠다”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에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세요? 자비하세요… “아이고… 너가 느끼는 그 고통 내가 잘 알지… 너가 겪고 있는 그 갈등 내가 잘 안단다!” 주님은 연약한 인간이 겪는 죄의 저주를 알고 계세요. 히브리서 2장 1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 연약한 인간이 되셔서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시험받고 고난 당하는 우리들을 가장 잘 도우실 수 있는 구원자가 되신다는 거에요. 히브리서 4장 15절 말씀도 보겠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앞서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대하시는 분이 아니세요. 체휼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아픔이 마치 자기 아픔인 것처럼 느낀다는 거에요.
다운 증후군 자녀를 둔 어머니의 고충을 누가 가장 잘 이해할까요? 똑같이 다운 증후군을 가진 자녀를 둔 어머니가 알아요. 자녀를 불의의 사고로 잃어본 부모의 마음을 누가 가장 잘 알아요? 똑같이 자녀를 사고로 잃어본 부모가 가장 잘 아는 거에요. 병원 암 환자센터에서 키모 치료 받고 있는 환자의 아픔과 고충을 누가 가장 알까요? 똑같이 암에 걸려 본 사람이 아는 거에요. 왜 오늘 본문 마가복음 14장 33-34절에서 예수님은 근심하고 슬퍼하고 계시니까? 왜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고 번뇌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정말 십자가 지는 것이 두려워서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이겨낼 힘과 능력이 없으셔서요? 아니에요. 예수님은 우리가 오늘 일상의 현장에서 매 순간마다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과 눈물을 누구보다 가장 잘 이해하시는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서 우리가 겪는 그 모든 시험을 친히 통과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은 모르시잖아요! 예수님이 뭘 아세요!”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되요. “주님, 주님은 아시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제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얼마나 괴로운지 예수님은 너무나도 잘 아시잖아요!” 하고 예수님을 붙들고 기도할 수 있는 거에요. 우리가 현재 아무리 괴로운 상황과 환경 때문에 고민한다고 한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계신 예수님의 고민보다 클까요? 예수님께서 느끼신 슬픔과 아픔보다 큰 슬픔일까요? 예수님께서 이해하지 못하실 아픔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가장 잘 아세요. 그래서 주님께 구하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니다.
자, 그래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시험 당하시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 와서요. 마가복음 14장 36절을 한 번 보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막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지금 예수님께서 놓여 계신 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절망’입니다. ‘죽음’이에요. 이 보다 더 힘든 고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도 예수님에게는 선택권이 있으셨어요. “십자가가 얼마나 아프고 괴롭겠는가?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도록 도망갈까? 편하게 살다가 다시 천국으로 돌아갈까?”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러실 수 있는 자유와 능력도 있으셨어요. 그러나 오늘 36절에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리와 유익을 다 내려놓으신 기도 였어요.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시니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 잔’, 즉 ‘고통의 잔, 죽음의 잔, 십자가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셨어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 아니라면, 자신의 기도 대로 응답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과 시험의 때를 예수님은 이처럼 기도로 승리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돌아오신 예수님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든 제자들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겠느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한데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고자 하는 유혹을 기도로 이기셨습니다. 기도로 시험을 승리하셨고,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기도로 인도함을 받으셨습니다. 동일하게 예수님은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순간과 시험의 때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훗날 상황이 다 지나고 났을 때, “그래 내가 바로 그 장소, 그 시간에 이 사안을 놓고 간절히 기도 했었지!” 하고 잊혀지지 않을 만큼 선명하게 기억날 수 있도록, 깨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일상은 늘 분주하고 피곤합니다. 우리 중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에 치여 잠들어 있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무엇 때문에 염려하고 계십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근심하며 슬퍼하고 계십니까? 우리 연약함을 아시는 예수님,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아시는 예수님께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