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1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마가복음 14장 12-21절)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오기 바로 전날 밤, 그들은 각각 집에서 어린 양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죽은 양의 붉은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사자를 이집트 땅에 보내셨습니다. 어느 집이든지 그 문에 양의 피가 없는 집은 죽음의 사자가 들어가 그 집의 장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집의 문에 피가 발라져 있는 경우 죽음의 사자는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다음 집으로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의 어린 양” 사건입니다. 유월절에 잡아 죽인 어린 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을 살린 것이죠.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 상징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며 흘리신 피가 우리를 죄의 저주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주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 12절에는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라는 대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날이 바로 유월절의 규례대로 각 가정에서 양을 잡아 먹는 날이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바로 이 날, 유월절 양을 잡는 날,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지시고, 병사들에게 잡혀 가십니다. 이를 통해 복음서는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들의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유월절의 어린양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월절 양 잡는 날은 고난 주간의 목요일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죠. 그러니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있었던 날입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을 잡는 이 날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양을 잡았던 조상들의 전통을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이 되면 함께 모여 양을 잡아 먹었습니다. 우리나라 설날에 떡국 먹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유월절 하면 양 잡아 먹는 날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주로 지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의 집에서 지내시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장소는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 입니다. 어디에 있는 누구 집에 가서 유월절을 지내야 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어 봅니다. “예수님, 유월절인데요. 저희가 어디 가서 양을 함께 먹으며 식사를 할까요?”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내에 들어가면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터인데 그가 들어가는 집에 따라가서 그 집 주인에게 유월절 음식을 먹을 객실에 대해서 물어보면 장소를 하나 대여해 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15절에 보면 이 집 주인이 빌려준 방은 큰 다락방입니다. 본래 유대의 다락방은 비교적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지신 다락방이 사도행전에 120명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다 오순절 성경강림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다락방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주장이 맞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객실을 빌려준 집 주인은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가의 부모인 셈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시겠어요? 우리 집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어요. 우리 집에서 역사의 그 위대한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났어요.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훗날 마가는 사도 베드로의 조력자이자 그가 아끼는 영적 아들로 신앙 지도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 양을 잡아 식사하고 편히 머무시도록 장소를 내어준 가정에 하나님께서 크게 복을 주신 것이죠.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섬기고 수고한 것 반드시 하나님께서 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제자들은 바로 이 다락방에서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양을 잡아 저녁 식사를 하게 됩니다. 열두 명의 제자가 다 함께 자리에 앉아 맛있게 유월절의 만찬을 나누고 있던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갑자기 청천병력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18절 말씀 보세요. “(막 14: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저녁 식사하던 제자들 깜짝 놀라 체하지 않았을까 모르겠어요. 지난 3년 반 동안 함께 해온 전우요,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우리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파는 배신자가 된다니 이 얼마나 황당한 소식입니까? 분위기를 한 번 생각해 보시겠어요? 예수님께서 장난으로 이런 말씀 하셨을리가 없으니까요. 제자들이 서로 말은 못하고, “누구지? 누구지?” 하며 눈치만 보고 있는 거죠.
결국 제자들은 한 사람씩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설마 저입니까? 저는 아니죠?” 그 때 예수님께서 20절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막 14:20)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이탈리아 식당에 가면,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에 빵을 줍니다. 빵에 버터를 발라서 먹기도 합니다만. 빵을 올리브 기름에 찍어 먹기도 합니다. 취향에 따라서는 올리브 기름에다가 발사믹 식초를 섞어서 찍어 먹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과 함께 그 올리브 기름이 담긴 그릇에 빵을 찍어 먹고 있는 제자가 바로 자신을 파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이죠.
성경을 읽는 우리는 이미 그 제자가 다름 아닌 가룟 유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20절 말씀대로 가룟 유다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과 함께 빵을 그릇에 찍어 먹을 정도로 가까이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유대 사회에서는 함께 식사한다는 상대방을 신뢰할 수 있고, 우정이 있는 관계를 뜻 합니다. 그만큼 가까웠던 가까웠던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일이 일어났으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제자들 중 그 누구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아 넘길 것이란 것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하실 수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를 설득하거나 말리셨으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제자에게 배반 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죽음에 대해서 21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막 14:21)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해서 기록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사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신 것이죠.
자신이 당할 채찍의 고통과 십자가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감내하신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분명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 보다 우리 자신의 유익을 앞세우지는 않았을까요? 희생 없이 신앙생활 하려고 하지는 않았을까요? 최근에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분명한 뜻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기 힘들어 외면한 말씀은 없었을까요? 자신이 당해야 하는 그 엄청난 고통과 죽음을 아시고도, 묵묵히 가룟 유다와 함께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처럼, 어떤 희생과 헌신에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