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5 순전한 마음으로 섬기는 자 (마가복음 12장 35-44절)


인간사회에서 옷이란 때로 특별한 직위를 나타내며 그에 따르는 권위를 상징합니다. 병원에 가면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얀 가운은 의사라는 신분을 나타내며 그가 환자들을 진찰할 수 있는 권위를 상징합니다. 법원에 가면 검정색 가운을 입은 판사들을 보게 됩니다. 판사들이 입은 검정 가운은 죄를 지은 자들을 심판할 권위를 나타내죠. 이처럼 옷은 특정한 지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신성시 하는 옷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입는 세마포 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긴 옷을 입고 일 했습니다. 서기관들 역시 세마포로 된 통 옷으로 땅에까지 닿는 긴 두루마리를 입고 다녔습니다. 또한 일반인들과 자신들이 입은 옷이 구별 되도록 긴 옷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새겨진 장식품들을 만들어 옷에 부착하고, 또한 옷 끝에는 옷술을 달고 다녔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들의 옷차림을 보고 그들이 서기관이며 율법과 제사에 관련된 일을 하는 자들임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서기관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연구하는 자들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니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처럼 긴 옷차림을 입고 다니는 서기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곤 했습니다. 문제는 서기관들이 사람들에게 인사 받고, 사람들이 자신들을 잘 대해주고, 높여 주는 것을 내심 즐기고 있었다는데 있습니다.
겉으로는 가장 고상하고 경건한 존재인 척 행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열의도 없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통해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위선자들인 거죠. 안타깝게도 이런 위선적인 서기관들의 모습은 오늘 날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가장 고상하고 경건해 보이는 목회자이지만, 속으로는 교회를 자기의 돈벌이로 생각하고, 성도들의 충성을 악용하여 자기 하수인처럼 부려먹는 거짓 목사들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자기 배와 욕심을 채우려 하는 삯꾼 입니다. 평신도 가운데서도 교회에서는 가장 순전한 자 같이 행세하지만, 알고 보면 교회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혹은 직분을 받기 위해서, 혹은 교회 성도들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착취하기 위해 거짓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늑대와 같은 신자들도 있습니다.
이 당시 서기관들은 모임에 가면 늘 상석에 앉기를 즐겨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을 섬기고 잘 해주는 것을 당연시 여기며 살았던 것이죠. 그러면서도 여전히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기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공동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가장 오랫동안 기도했던 서기관들의 모습은 사람들이 볼 때 매우 경건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아마 목소리 톤도 중저음으로 꾸미지 않았을까요? 어제 새벽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성경의 가장 큰 계명입니다만, 이 서기관들은 이러한 삶 보다는 자신의 실리를 추구하고 타인들로부터의 주목 받는 것과 평가에 더 관심을 두었습니다.
40절을 보면 서기관들이 심지어 과부의 가산을 삼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부장 사회였던 유대 사회에서 남편을 잃어버린 ‘과부’는 고아와 함께 경제력을 잃어버린 사회적 약자 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그 누구보다 보호 받아야 하고 보살핌을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성경도 고아와 과부의 권익을 보호하고 돌봐야 하는 의무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인 서기관들이 도리어 과부들의 가산을 교묘하게 착복했다는 것은 부도덕이며 극악무도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악행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물욕과 명예욕에 눈이 멀어 하나님과 성도들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 시켜 버렸습니다. 서기관들이 사람은 속일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서기관들처럼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들은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얻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이러한 외식을 경고 하셨습니다. 40절 말씀을 보시겠어요?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자, 여기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경건한 척 하는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대비 되는 또 하나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과부였습니다. 이 당시에 성전 앞 광장에는 큰 헌금통을 비취 해 두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 헌금함에 돈을 넣을 수 있었습니다. 총 13개가 비취 되어 있었는데요 이 중 9개는 성전세를 내거나 희생 제물 대신 바치는 헌금을 넣는데 쓰였고, 나머지 4개는 성전을 고치고 수선하고 장식하는 데 쓰는 일을 위한 헌금통이었습니다.
이 당시 화폐는 지폐가 아니라 전부 금화 혹은 은화로 되어 있는 동전 입니다. 헌금함은 딱딱한 놋쇠로 제작된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었습니다. 그러니 헌금함에 금속으로 되어 있는 동전을 넣을 때마다 놋쇠와 닿으며 땡그랑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게다가 헌금함이 놓여 있는 곳 주변에는 늘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헌금함은 개방되어 있었기에 어느 누가 헌금을 하는지 다 볼 수 있었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들은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많은 양을 하나님께 헌금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며 은근히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심지어 부자들 사이에는 누가 더 많은 헌금을 내는가 하는 보이지 않는 경재도 있었습니다. 헌금을 통하여 자신이 가진 부를 과시하는데 사용한 것이죠. 자신이 부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동전을 헌금함에 넣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많은 돈을 지불하고 있는 부자들에게 향해 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한 과부에게 주님의 시선이 고정 됩니다. 4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막 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과부가 얼마를 냈습니까? 두 렙돈 입니다. 한 렙돈은 오늘날로 치면 얼마 정도 될까요? 렙돈이 얼마나 작은 돈이냐 하면 당시 로마 제국에서 사용되던 가장 작은 화폐 단위인 고드란트의 절반의 가치 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 당시에 한 사람의 인부가 하루 종일 일해서 버는 돈을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인 거죠. 이 데나리온을 128조각으로 나누면 한 렙돈이 됩니다. 만일 한 사람의 인부가 오늘날 일해서 버는 돈이 100달라라고 하면 그거 128개로 나누면 얼마입니까? 약 80 cent 입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가 본문에서 헌금함에 넣은 돈을 오늘 미국 시세로 환산해 보면 $2달라도 채 안 되는 1달라 60 센트 정도 낸 거죠. 이 여인이 얼마나 가난한 상황이었는지 짐작이 됩니다.
조금 전까지 부자들이 와서요 헌금함에다가 포대에 가득한 금화와 은화를 가지고 와서 ‘땡그랑’ 소리가 그칠 줄 모르게 헌금을 갖다 말 그대로 헌금함에 부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보시고 어떻게 평가 하셨습니까? 43절 함께 읽겠습니다. “(막 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예수님은 헌금함에 돈을 넣는 그 어떤 부자보다 이 가난한 여인이 가장 많은 것을 넣었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이상하죠? 금화를 큰 포대에 싸가지고 부은 부자들이 아니라, 오늘 돈으로 환산해도 2달라도 채 안 되는 두 렙돈을 낸 이 여인이 가장 많이 냈다고 하니 말입니다. 분명 액수로 보면 부자가 더 많은 돈을 헌금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산 방법은 인간의 계산 방법과 전적으로 다릅니다. 산술적으로는 잘못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계산은 산수가 기준이 아니라 신앙이 기준이므로 결코 오류가 아닙니다. 44절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평가 하신 이유가 나오죠? 함께 읽겠습니다. “(막 12: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부자들은 자신의 부함을 자랑하기 위해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주님께 드린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돈은 그녀의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활비라는 것은 원어를 보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쓰이는데 필요한 돈’ 입니다. 의식주 문제를 포함하여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비용 전부를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녀의 이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 가난한 과부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헌금의 액수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헌금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외식하며 약한 자를 착취한 서기관들보다, 가난할지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태도를 가진 가난한 과부가 주님 보실 때는 더 거룩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순전한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되려면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기 위한 위선적인 신앙, 내 욕심과 재물을 위해 섬기는 거짓된 신앙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모습으로 우리 삶의 전부를 주님께 드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