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라는 도시에 ‘바디매오’라 이름하는 소경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 어귀에 앉아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한 품 줍쇼! 한 품 줍쇼!”하고 외치는 것이 그가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 것입 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는 청각이 남들보다 더 예민 했을 것입니다. 두 귀에 들려오는 소문들을 주의 깊게 들었던 것이죠. 최근에 여리고에서도 가장 많 이 들을 수 있는 소문의 주인공은 역시 ‘나사렛 예수’입니다. 소경 바디매오도 동 네 사람들이 오고가며 하는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아니 글쎄, 나사렛 예수가 병 든 자들을 능히 고친다는구먼. 지난 번에는 귀신 들린 자도 능히 고쳤다지?” 벌써 바디매오도 이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어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소문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소문도 포함 되어 있었 습니다. 바디매오는 꼭 한 번 예수를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저 나사렛 예수가 혹시 내 눈도 뜨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리 예수 님을 만나러 가고 싶어도 눈 앞이 보이지 않는지라, 저 먼 갈릴리까지 갈 방법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사람들이 한 소경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고쳐달라 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 아마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디매오는 사 람들이 그를 예수께 데리고 갈만한 상황이 아니었거나, 그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 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디매오는 많은 무리가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것을 깨닫 게 됩니다. 무리의 웅성이는 소리, 많은 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지나가는 것이죠. 바디매오는 평생을 여리고 성 문 앞에서 구걸해온 사람입니다. 평상시 사람들이 이 길을 다니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일어난 것을 직감한 것이죠. 그래서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여러분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한 곳에 모여 길을 지나가고 있습니까?”
그 때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소문의 주인공 나사렛 예수를 아시오? 어떤 병자도 능히 고친다는 그 사람 말이요.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기적의 주인공 예수가 지금 우리 동네를 향해 오고 있소! 조금 후면 이 앞을 지 나갈 것이요!”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이 앞을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
다. 그러나 언제, 어느 타이밍에 예수님께서 자기 앞을 지나갈 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때부터 고래고래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 했습니다. 47 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막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 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7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 람들은 분명 그에게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 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 라고 부른 이유는 그곳이 예수님의 출신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디매오는 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을까요? 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 님께서는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위를 물려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는 다른 지파 출신이 아니라 유다지파 출신의 다윗의 피를 이어 받은 자 입니다. 따라서 본문 에서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 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는 것 입니다.
그가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사람들이 저를 제지했습니다. 48절 말 씀을 보니 한 두 사람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저를 꾸짖었습니다. 한 번 이 장 면을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성경은 단순하게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혹시 그에게 심한 욕을 한 사람은 없었을까요? 그 의 인격을 모독하며, 그를 무시하는 말투로 그를 제지한 사람은 없었을까요? 짜 증을 내거나 화를 내며 협박하듯 무서운 어투로 그를 꾸짖은 사람은 없었을까요? 그러니 웬만한 사람이었으면 이런 군중의 꾸지람 앞에서 부르짖기를 멈추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달랐습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일생일대의 기회임 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앞을 지나가시면 또 언제 이곳에 오 실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다시 안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 을 놓치면 평생 못 보게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가 잠잠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디매오는 더욱 더 큰 목소리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 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의 귀에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이 들렸습니다. 49절을 보니 ‘예수께서 머물러 서’ 계십니다.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었던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시켜 저를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여보게 안심하게고 자 리에서 일어나게나 예수님이 자네를 부르셨네!”하고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말 을 들은 바디매오의 반응도 놀랍습니다. 그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50절 말씀을 한 번 보세요 “(막 10:50) 소경이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겉옷은 단지 옷으로만의 기능을 가진 것 이 아니라,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틴 지역에서 겉옷은 이불 (blanket)의 역할을 합 니다. 소경이요 거지였던 바디매오에게는 생활 필수품이고 없어서는 안되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자신의 겉옷이 예수님께 재빨리 나아가 는데 방해물이 되자, 자기에게 귀중했던 겉옷을 미련없이 내어 버린 것이죠. 예수 님 만나러 가기 위해 두 손에 쥐고 있던 겉옷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디 매오가 가진 마음 속 믿음과 소망을 보게 됩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이라면 나를 치유해 주시겠지!”하는 믿음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네게 해 주기 원하느냐?” 그러자 바디매오가 즉시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 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52절 말씀을 보니 ‘저가 곧 보게’ 되었습니다. 52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미루어 볼 때 저의 무엇이 두 눈을 뜨게 하였습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간절함을 담아 고백하는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시고,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바디매오의 고백 과 행동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도전이 됩니다. 바디매오와 같은 간절 함으로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때 우리는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 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방해가 되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 주님께 내 드리며, 바디매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