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이미 두 차례나 제자들에게 자신의 수난을 예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받으실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도 다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3번째로 자신이 받으실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33절-34절을 보십시오. “(막 10: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막 10: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매우 구체적으로 자신이 당할 고난을 나열하셨습니다. 능욕, 침 뱉음, 채찍질, 그리고 죽음 입니다. 가벼이 넘길 주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 보다 자신이 얻게 될 영광에 더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참 미성숙한 제자들 입니다. 지금 아버지가 큰 수술을 앞두고 여기저기 아파서 병원 병실에 누워 계신데, 아들은 스마트폰 보며 오늘 저녁 뭐 먹을까 히죽 거리며 검색하는 꼴 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계신 예수님은 얼마나 괴로우셨을까요?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공감하거나, 구체적으로 이 것이 무슨 말씀인지 물어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들 자기가 챙길 밥그릇만 보고 있는 거죠.
32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금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입니다. 여태까지는 저 변두리 갈릴리에서 주로 사역을 하셨는데, 이제는 유월절 절기를 맞이하여 종교와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 수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계신 것이죠. 수많은 인파가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따르고 있는 이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을 보며, 이제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시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되실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가까울수록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크냐? 누구 서열이 더 높냐? 예수님이 왕 되시면 누가 국무총리 할거냐? 누가 어디 장관 맡을거냐?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아무리 자기들끼리 씨름하고 다투어봤자, 결론이 안 나옵니다. 결국 서로 눈치만 보던 참에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두 사람은 형제 사이 입니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소원을 예수님께 아뢰기로 결심합니다. “선생님,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그토록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한 가지, 생업도 포기하고 그 동안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쉼 없이 예수님을 따랐던 바로 그 이유! 그 목적을 달성할 때가 온 것이죠. 이들은 설례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입을 열었습니다. 37절 말씀 입니다. “(막 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선생님, 이번에 예루살렘 에 올라가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시게 되면, 그 때에 저희 둘 중 한 사람은 왕의 우의정, 다른 한 사람의 왕의 좌의정 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저희가 그 동안 모신 것처럼 잘 모시겠습니다. 저희에게 높은 자리 하나씩 꼭 주십시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국무총리자리, 부총리 자리 청탁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 동안 예수님 따른 이유가 어디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정치적인 왕이 되실 것으로 생각했던 거죠. 그리고 그 때에 한 자리 해 먹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제자들과는 위치가 좀 다릅니다. 12제자라고 해서 다 같은 제자가 아니었어요. 예수님의 12명의 제자가 있지만, 그 안에서도 Inner Circle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늘 12명을 데리고 다니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제자 중에 3명만 뽑아서 다니셨어요. 그 세명에 들어간 사람이 바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 집에 들어가시면서 사람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셨어요.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갔어요. Inner Circle 인 셈이죠.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기도하러 올라 가실 때도 9명의 제자들은 산 아래에 있었고 오직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사람만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12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이며, 예수님께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과 심혈을 들여 훈련한 제자들 입니다. 학급으로 말하면 말하면 베드로가 반장, 야고보가 부반장, 요한이 총무인 셈입니다. 12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최 측근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는 말이 “주님, 이스라엘의 왕 되실 때 우리 두 사람에게 꼭 각각 좋은 자리 한 자리씩 챙겨주십시오!” 하고 청탁하고 있는 것이죠. 조금 전 자신이 당할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설명하신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이 얼마나 황당한 시츄에이션입니까? 죽음을 앞둔 아버지 앞에서 유산 달라고 조르는 철부지 없는 아들과 뭐가 다르겠어요? 괘씸한 제자들 입니다. 오늘 본문의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을 보면 사실 이 청탁을 한 것은 야고보와 요한 두 사람의 어머니 ‘살로메’ 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예수님께 한 자리 달라고 청탁하고 있는 거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지금 이스라엘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가시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왕의 자리에 오르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이르실 때 자기들도 우편과 좌편 한 자리씩 차지할 수있도록 부탁한 것이죠. 예수님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8절 말씀 입니다. “(막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과 세례는 예수님이 당하시게 될 고난과 죽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잔이 왕의 마시는 금으로 만들어진 포도주 잔, 세례는 왕으로서 임명 받기 위한 종교적 절차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각각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잔과 세례를 자신들이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네 주님 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그 잔과 세례를 받겠습니다.” 이에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서 마시는 잔을 마시고, 주님께서 받으시는 세례를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야고보는 AD 42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지 약 10년 뒤에 아그립바 1세에게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요한의 경우 밧모섬에 죄수로 유배되어 수감생활을 하고 후에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탁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던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은 분개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분개한 이유는 “어떻게 고난과 죽음이라는 거룩한 사명을 가지신 예수님께 그렇게 무례하게 굴 수 있는가?”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 역시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한 마음이 있었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선수를 치고, 대놓고 예수님께 청탁한 것에 대한 분개의 마음이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을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했던 것이죠. 열 제자들이 화를 낸 것을 보면, 결국 그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어제 새벽에 살펴본 마가복음 10장 28절을 보면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표현 했는데, 그것은 버린 것이 아니라 나중에 예수님 곁에서 한 자리 차지 하기 위한 ‘투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내려놓음이 아닌 것이죠.
지난 3년 동안 말씀 가르치고, 제자훈련 하신 예수님…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십자가 지는 일만 남으셨는데… 제자라는 자들이 이렇게 자기 밥그릇 챙길 생각만 하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고 아프셨을까요? 서로 분을 내며 서열 싸움을 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또 다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42-44절 말씀 입니다. “(막 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막 10: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권력의 자리를 두고 예수님 앞에서 추태를 부리고 있는 제자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는 높아지고 군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지고 종이 되는데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 입니다. 43절에 나오는 ‘섬기는 자’ 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왜 중요하냐면 나중에 이 단어가 ‘집사’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집사님, 집사님’ 부르는 명칭에는 ‘섬기는 분’이란 뜻이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자신 역시 ‘디아코노스’ 즉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45절 입니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장 45절은 암송하십시오. 복음서마다 핵심이 되는 구절이 하나씩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16장 16절, 누가복음은 19장 10절, 요한복음은 3장 16절, 마가복음은 바로 10장 45절 입니다. 이 구절들은 각각의 복음서들이 예수님은 누구시며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무엇하러 이 땅에 오셨어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해 내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른 이들을 섬기고 우리의 목숨까지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내어주는 삶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처럼 인간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성공하고 부자 되기 위해서… 세상에서 떵떵 거리며 살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 내려놓아야 하는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 입니다. 제자들은 겉으로는 주님을 따랐으나 속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우리들도 야고보와 요한처럼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나 속으로는 내 개인의 욕망을 섬기고 있을 수 있음을 깨닫고 늘 주의해야 합니다. 남은 우리의 생애, 내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