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42절에서 나오는 소자는 말 그대로 작은 자 입니다. “나를 믿는 이 소자”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 중 나이가 어린 자, 혹은 힘이 없어 나약한 자, 가난한 자, 아직 성숙함에 이르지 못한 미성숙한 제자들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로 비유하자면, 믿음이 자라가는 주일학교 어린이, 중고등부 학생, 새신자, 혹은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자, 병든 자, 고아, 과부, 노약자, 그 밖에 모든 힘 없는 자들 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실족케 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여기서 실족케 한다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예수님 잘 믿으려고 어렵게 결심한 새신자 중에 김 집사님이라는 가정의 인물이 있다고 한 번 상상해 보겠습니다. 김 집사님이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배우고자 큰 결심을 하고 어렵사리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교회 다니는 박 집사님이 자꾸만 이 분을 꼬드기는 거에요. “김 집사, 교회 온지 얼마 안되었지? 이따 주일 예배 끝나고 우리 집으로 와서 나랑 한잔 같이 하며 이야기하자고! 내가 신앙생활이 뭔지 알려줌세.” 그러면서 집에 데려가서 이 분에게 이상한 내용만 가르쳐 주는 거에요. 주일 성수 잘하고 있는 김 집사님 미혹해서 주일날 다른 데로 놀라가게 합니다. 올바른 믿음에서 빗나가도록 부추기는 것이 바로 본문에서 나오는 ‘실족케 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더 낫다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죽음입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러한 죽음의 배경을 더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어머니들이 가정에서 맷돌로 콩을 갈아서 콩국수도 해먹고 순두부도 만들어 먹었습니다. 맷돌이라 해도 여인의 손으로 돌릴 수 있을만큼 작았던 것이죠.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맷돌은 한 손으로 돌릴 수 있는 작은 사이즈의 맷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맷돌’이라고 부르지만 유대인들은 ‘당나귀 돌’이라고 불렀습니다. 있는 힘껏 다해 돌려야 할 만큼 큼직한 돌 입니다. 그런데 이런 큰 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로 바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러한 방식이 로마의 처형법 중 하나로 사용 되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자국민들은 절대로 이렇게 죽게 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방인들이 중범죄를 지은 경우 도너츠처럼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돌에 몰을 매어 바다에 가라앉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고 계시던 갈릴리 지방에서도 로마 정부에 반대하는 저항세력에 대하여 로마 군사들이 이런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잡아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반 로마파 사람들 역시 헤롯 왕을 섬기는 자들을 같은 방법으로 죽이기도 했습니다. 근데 한 번 생각해 보시겠어요? 무거운 돌 나르는 것은 처형을 집행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런 방식으로 사람 목에 무거운 돌까지 얹어서 바다에 던졌을까요? 그것은 로마 사람들의 사고 방식 때문입니다.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로마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하데스’라는 곳으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다에 빠진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자가 가야 하는 세계로 가지 못하고 영원히 물 속에서 떠돈다고 믿었던 것이죠. 그러니 무거운 돌을 목에 매고 죽이는 로마의 사형법은 단순히 육신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는 죽어서도 죄수의 영혼 조차 영원히 죽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든다는 아주 무서운 의미를 가진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당시 사람들의 문화에서 보면 ‘연자 맷돌’에 목을 매어 바다에 던져 죽는 사형은 장례식도 치뤄줄 수 없는 최악의 죽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42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정리해서 말해보면, “소자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는 자는 차라리 최악의 방법으로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신 것이죠. 왜 예수님께서 차라리 이런 방식의 죽음이 더 좋겠다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소자를 실족하게 한 사람이 죽어서 받게 될 벌은 연자맷돌을 목에 지고 죽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크고 무섭고 끔찍한 형벌이 그 앞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형벌일까요? 바로 ‘지옥 형벌’입니다.
귀신들도 가기 싫어서 두려워서 벌벌 떠는 곳이 바로 지옥 입니다. 우리 중 지옥을 눈으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상상해 볼 뿐입니다. 오늘 본문 48-49절에서 예수님은 지옥이 어떤 곳인지 짧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막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 9: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혹시 살면서 구더기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예전에 시골에 가면 화장실이 다 재래식 화장실이었어요. 일명 ‘푸세식 화장실’이라고 하죠? 구덩이를 깊게 파고 그 위에서 사람들이 볼일을 보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분뇨가 한 자리에서 쌓이게 됩니다. 무더운 여름이 되면 너무 더럽고 냄새가 너무 심해요. 그 안에 사는 게 구더기 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더러운 게 없어요. 들판에서 자라는 양들이요. 무더운 여름이 되면 나무에 달려가서 엉덩이 부분을 막 비벼요. 가뜩이나 너무 더운데 더꺼운 양털 때문에 땀이 배출이 안 되니까 간지러워서 나무에다가 몸을 막 긁는 거죠. 그런데 그 양의 털을 이렇게 들어 보잖아요. 그럼 그 안에 구더기가 자라고 있어요. 세상에 구더기만큼 악취가 심하게 나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존재가 또 있을까 모르겠어요. 그런데 지옥은요. 그 구더기가 죽지도 않고 살아있는 곳이에요.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악취가 나고 더러운 곳이죠. 음식물 쓰레기, 오물이 가득한 쓰레기장도 그에 비할 수 없습니다. 지옥이 더 무서운 이유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는 곳이죠. 찜질방 가면 제일 뜨거운 방을 대체로 ‘불가마방’ 이라고 합니다. 어떤 찜질방은 화로에다가 달군 뜨거운 돌들을 불가마방에다가 갔다가 놉니다. 그러면 돌에서 열기가 나오는데요. 얼마나 뜨거운지 저는 들어가면 5분도 못 버팁니다. 체질적으로 ‘지옥 체질’이 아니에요. 그런데 지옥은 어떤 곳이에요? 불에 달군 돌이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 아예 불 그 자체가 가득한 곳입니다.
미국은 국민학교에서 학부모 중 한 사람이 교실에 와서 자기 직업을 아이들에게 소개하며 아이들과 이야기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한 소방관 아저씨가 자기 아들이 있는 교실에 찾아왔습니다. 미국인들에게 소방관은 영웅입니다. 한 꼬마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어요? “소방관 아저씨에게도 무서운 것이 있나요?” 그러자 소방관이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3도 화상보다 무서운 것은 없단다.” 불에 화상을 입은 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얼굴이 녹아요. 살이 초콜렛처럼 녹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이런 시절 라면 먹으려고 물 끓이다가 사고로 끓는 물을 왼쪽 팔에 부었는데 피부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쪼글쪼글 합니다. 피부가 얼마나 심하게 일그러졌는지 몰라요. 더운 여름에도 반팔을 못 입어요. 세상에, 끓인 물에 닿아도 그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끓은 물도 아니고 직접 불 그 자체에 빠진다… 전신이 불에 타 들어가는 거죠. 이 보다 더 심한 고통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지옥은 인간이 상상을 뛰어넘는 모든 고통의 집합소 입니다. 죄의 결과가 그렇게 무서운 것이죠. 또 다른 한편으론 우리를 이러한 지옥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이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지옥이 어떤 곳인지 너무 잘 알고 계세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이처럼 고통스런 지옥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도록 가장 강력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게 43-47절 말씀입니다. “네 손이 죄를 짓게 하느냐? 손을 잘라 버려랴! 한 손 없이 천국에 가는 것이, 두 손 가지고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 “네 발이 죄를 짓게 하느냐? 찍어 버려라! 한 발로 절뚝거리며 천국에 가는 것이, 두 다리로 터벅터벅 걸어서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네 눈이 너로 범죄게 하느냐? 눈을 뽑아버려라! 한 쪽 눈만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것이, 성한 두 눈으로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다!” 우리 몸의 기관이 여러가지 인데 왜 예수님께서 ‘손, 발, 눈’ 세 가지 기관을 이야기 하셨을까요? 고대 유대인들은 인간이 가진 모든 신체 기관 중에서 ‘손, 발,’ 눈’ 이 3가지가 충동적인 유혹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사고 방식에 맞추어 죄에 가장 취약한 손, 발, 눈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신 것이죠.
본문에 나오는 44,46절에는 ‘없음’이란 말이 반복되어 나와 있습니다. 있으면 적고, 없으면 아예 44절과 46절을 빼 버리지 ‘없음’은 또 뭘까요? 분명 44절과 46절의 말씀은 권위 있는 사본들에는 이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몇몇 사본에는 빠지지 않고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내용일까요? 48절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막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지옥이 얼마나 더럽고 무서운 곳인지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과감하게 죄를 끊어 버리기로 결단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죄는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죄와 함께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 천국에 들어가는 일 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지옥의 심판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예수님은 어떤 희생과 대가 지불을 치르더라도 죄를 끊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손을 자르듯이, 발을 찍어버리듯이, 눈을 뽑아 버리듯이 죄는 끊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단호히 끊어버려야 하는 죄가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과감하게 죄를 끊어 버리기로 결단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