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3 편견으로 은혜를 놓치다 (마가복음 6장 1-6절)

마가복음 5장까지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리 가버나움이란 마을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가버나움에는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의 집이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서 주로 머무시며 사역을 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죠.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는 장면이 보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고향’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만, 히브리어를 보면 “그의 아버지의 땅으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나사렛’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나사렛 출신이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은 유년시절을 나사렛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니 한 번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한국도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예전 모습을 떠올려보면, 웬만한 동네 사람들은 이웃끼리 서로 다 알고 지냈습니다. 어느 집 가정에 자식이 몇 명이고, 누가 누구 아들이고, 저 집 숫가락은 몇 개고, 아이들 성격 어떤지 웬만큼 다 압니다. 또 오늘날에야 사람들이 직장 때문에 이사도 가고 합니다만, 농경사회는 한 평생 태어난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 합니다. 그러니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의 십대, 이십 대 모습을 다 보고 함께 생활 한 사람들입니다.
고향을 떠난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이 나사렛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다른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위대한 선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어린시절부터 보아왔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 가족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비범한 이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목수 요셉과 친하게 지낸 동네 어르신들이나, 마리아와 같이 빨래터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던 동네 아주머니들이나 예수님과 같은 또래로 자라난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던 같은 동네 출신 예수가 이 엄청난 기적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더욱 믿기가 어려웠던 것이죠. 때마침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온 동네 사람들이 회당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날 입니다. 특별히 이번 안식일에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자, 나사렛 출신으로 이스라엘 전역의 인기스타가 된 예수님을 보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나사렛 동네 회당에 모여들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 나사렛의 학군은 전국 꼴찌 수준 입니다. 게다가 예수는 가난한 목수 집안 출신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은 서기관들조차 가르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두 눈이 휘둥그레 지는 거에요. 오늘날로 말하면 국민학교를 중퇴한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데,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수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잘 가르치는 거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손을 통해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 몸이 아픈 병자에게 손을 얹자 병이 깨끗하게 낫는 거에요.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너무도 신기하여 서로 수군수군 거렸습니다. “아니 이 사람은 우리 동네 출신 아닌가? 어디서 이런 권위 있는 말씀을 배웠지? 아니 어떻게 저를 통해 이런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지?”
3절을 한 번 보세요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사람들은 예수님 가족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 언급 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로 보아 아마도 요셉은 이미 죽고, 예수님이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아 목수로 활동해 오셨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들이 소개되고 있죠?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낳은 또 다른 형제들 입니다.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그리고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여동생들도 있었어요.
분명히 가르치는 말씀이나, 나타나는 능력으로 보면 위대한 선지자 급인데, 그 뿌리는 너무 초라합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 달동네 나사렛 출신이에요. 그러니까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대하게 보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우리 동네에서 목재나 석재를 다루는 공사장 인부 아니던가? 무슨 저런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이겠는가?” 예수님께서 이런 시절부터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왔음을 잘 알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한 거죠. 3절 마지막에 ‘예수를 배척한지라’는 말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 입니다. 예수를 섬길 수 없다는 거에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5절에 흥미로운 표현 하나가 등장 합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왜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 나사렛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을까요? 오히려 고향이면 지인들도 많고, 어려서부터 익히 친하게 지낸 사람들도 있으니 병자들도 더 많이 고쳐 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란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이란 동네에 들어가심으로 인해 갑자기 병을 고치는 능력이 사라지거나 능력이 그를 떠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불신의 자리에서는 그 능력을 제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능력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능력을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아낌없이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혈루증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다고 믿자 그녀의 병이 나았습니다.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을 끝까지 자기 집으로 모셔가는 믿음을 보이자 딸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충만하십니다. 그러나 그의 충만한 능력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나타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고향에서 다만 소수의 병자만 안수하여 고치실 뿐 많은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거 못해 주실거야… 내가 예수님께 기도 드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러한 편견을 가진 사람은 은혜를 놓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 도움과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또한 기도해도 형식만 있지 예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란 믿음은 없기 때문에 기도에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익숙함이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불신을 키웠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지식이 오히려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는 교만함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나사렛 사람들과 같은 어리석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내가 교회 몇 년 다녔는데? 내가 예수님 모르나? 이러 이런 건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되더라고…”, “저런 기적은 성경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내 삶에서는 절대 안 일어나. 내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데?” 우리가 가진 좁은 신앙의 경험과 지식이 오히려 예수님을 향한 불신을 나타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편견이 은혜를 놓치게 만듭니다. “예수님도 이건 못 도와주셔…”라고 속으로 은밀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불신을 제거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은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새벽 우리 마음 속 하나님을 향한 불신의 마음을 제거하십시오. 주님에 대해서 가진 편견을 제거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십시오. 묵묵히 주님께서 하실 일을 기도하고 기대하십시오. 우리가 가진 지식과 판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놓치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그 은혜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