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7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가복음 2장 1-12절)


마가복음 1장에는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의 병을 고쳐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자신이 병을 고쳐 준 것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사역의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에는 집중하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는 치유와 기적에만 주목하는 현상을 피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때론 예수님께서도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사역하실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보고자 따라다니는 많은 무리들이 있으면 한 영혼 한 영혼 집중해서 돌보며 사역하는 시간을 갖기가 어려워 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문둥병자에게 자신이 병 고친 사건에 대해서 함구할 것을 당부하신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병이 나은 문둥병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많이 전파하여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인파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가버나움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베드로 집 주변에도 예수님을 보기 위한 인파가 밤낮 머물렀습니다. 가버나움 거리 곳곳에는 예수님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로 가득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다시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한적한 곳에서 따로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수 일 뒤, 상황이 비교적 잠잠해지자 그제서야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또 다시 많은 사람들이 그가 머무는 곳에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지 2절 말씀을 보니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키가 작은 사람은 까치발을 들고 예수님을 봐야 하는 상황 입니다. 저 멀리 서 있는 사람은 예수님 보겠다고 서로 밀치고 있는 상황 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날 예수님을 보기 위해 가버나움에 찾아온 많은 사람 가운데는 침상을 들고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4명의 사람이 각각 침상의 한쪽을 잡고 그 위에 중풍병자를 실어 예수님 계신 곳으로 데려가려 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중풍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원어 성경을 보면 ‘이 병은 뇌출혈로도 볼 수 있고, 혹은 몸의 일부분 혹은 전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병을 암시 합니다. 걸어서 예수님께 직접 갈 수 없었기에 침상에 눕혀 네 명이 들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중풍병자의 가족이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친구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들이 얼마나 먼 곳에서 왔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자 하여 집 주변을 가득 맴돌고 있었기에 이들은 예수님의 얼굴 보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침상을 들고 예수님 계신 곳까지 갈 방법이 없습니다. 이 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또 다른 환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몸에 질병이 있는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너도나도 다 주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니 이 네 명이 사람들을 붙잡고 “저희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면 안 될까요?”하고 부탁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 문제 없는 사람이 없고, 안 아픈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 없는 사람이 없고, 해결 받기를 기다리고 싶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침상에 누워 있다고 사람들이 양보 해줄리 만무 합니다.
이대로 침상을 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안 고쳐 주시면 이 중풍병자는 평상 이렇게 식물인간처럼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가기 어렵게 되자, 결국 이 네 사람은 침상을 들고 예수님께서 거하고 계신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대부분 집들은 지붕이 피라미드처럼 삼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약성경 당시 이스라엘의 지붕은 평평한 모양이었습니다. 게다가 집 외부에 계단이 있어서 계단을 통해 쉽게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한국도 서울에 주택가 중에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집죠? 옥상까지 가는 계단이 있는 집들을 생각해 보시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이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서민들의 지붕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요? 집 중심에 큰 나무로 들보가 세로로 놓여 있습니다. 들보를 중심으로 작은 나무들을 가로로 차곡차곡 놓습니다. 그 다음 작은 나무 위에 짚을 덥습니다. 집 위에 진흙을 발라 놓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벗겨 낼 수 있는 지붕 구조 입니다.
이 네 사람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추정 되는 지붕을 뜯었습니다. 이 때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흙 먼지가 쏟아져 내리는 장면을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집, 이 사람들 집 아닙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이 집에 제자 베드로의 집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 봅니다. 자기 집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계시고 수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는 시간이라, 흙먼지가 지붕에서 떨어질 때 여기저기서 불평과 불만의 목소리가 들려 왔을 것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서 이 네 사람이 보여준 용기는 실로 대단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중풍병자와 그를 매고 온 네 사람의 관계가 보통이 아님을 추측해 보게 됩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남의 집 지붕을 뜯을 정도였으니 정말 친한 사이 였을 것입니다. 지붕을 뜯은 네 사람은 구멍이 난 지붕 틈 사이로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침상을 줄로 달아 내려 보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장면을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습니다. 내가 만약 중풍병자였다면 어떠 했을까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서 도무지 예수님께 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한 사람의 무게를 들고 옮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네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내가 병이 낫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지붕까지 뚫었다? 줄을 달아 예수님 앞으로 내려다 주었다. 나 한 사람을 위해서 네 사람이나 큰 희생과 수고를 감당해 주고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 큰 감동 아니겠습니까?
이 네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면 반드시 고쳐 주실 것이란 확실한 믿음이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복음서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많은 경우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군중들’, ‘무리들’이었다는 점입니다. 12년간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도 군중이었고, 앞을 보지 못한 맹인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부르지 못하도록 막은 것도 군중들이었습니다. 병자들을 향한 ‘사회적인 냉대’와 ‘멸시’가 이들이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장벽이었어요. 그러나 이 장벽을 믿음으로 뚫고 나가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치유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이 본문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 이 중풍병자가 나은 이유는 병이 든 당사자의 믿음 뿐만 아니라, 5절 말씀을 보면 침상에 누워 있는 저를 사랑한 동료들의 믿음의 결과 였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11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의 이 권위 있는 말씀에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이제는 자기가 누워 있던 그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던 가운데 두 발로 걸어 나갔습니다.
중풍병자는 홀로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네 명의 사람들이 그를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 네 사람이 중풍병자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그들의 사역과 헌신으로 한 생명이 살아난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 주변에 자기 혼자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혼자 교호 못 오는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홀로 절대로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저들을 침상에 매어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데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사람들의 따끔한 눈초리를 보게 되고, 조롱조의 비난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 입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면 반드시 저가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 확신한 네 사람의 믿음처럼, 우리들도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내 가족과 부모 형제 친구와 이웃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