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5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더니 (마가복음 1장 32-39절)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갈릴리에 있는 가버나움이란 마을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회당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날 회중 중에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 소리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당신과 우리들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예수님께서 그를 꾸짖으시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키게 하더니 큰 소리를 지르며 그 사람에게서 나왔습니다. 그 날 회당에 찾아온 많은 유대인들은 눈 앞에서 펼쳐지는 이 기이한 광경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 날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낸 나사렛 출신 예수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져 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올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먼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고 싶었지만 안식일이 지나가기만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곧 안식일의 해가 저물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시계 바늘이 자정을 지나야 다음 날이 되지요? 그럼 시계가 없었던 과거에는 어떠했을까요? 해가 저물면 그 날이 끝난 것입니다. 해가 저물면 다음날이 된 셈이죠. 오늘 본문 3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무슨 말일까요? 안식일이 끝났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안식일 규례 때문에 예수님 보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안식일이 지났으니까 갈 수 있던 거에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시겠어요?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은 기적을 행한 예수님이라면 혹시 병도 고치실 수 있지 않을까요? 구약성경에는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이 병을 고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이라면 자기들의 병도 고쳐 주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두 다리를 못 쓰는 얘에요. 내 딸이 걸을 때마다 한 쪽 다리를 끌면서 다니는 절름발이에요. 평생 동네 아이들이 다리 병신이라 조롱하고 돌도 던지고 놀려 댑니다. 내 아들이 간질이 있어서 때마다 거품 물고 쓰러집니다. 내 딸 아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려서 자꾸만 몸에서 피와 고름이 나와요. 아이를 볼 때마다 부모인 내 가슴에 눈물이 마르지를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낸 “나사렛 청년 예수”예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부모라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내 아들, 내 딸 고쳐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예수께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32절 보시겠어요? “(막 1: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까요? 원근각처 사방팔방에서 모여드는 거에요. 내일 아침에 해가 뜬 후에 찾아가면 예수님이 또 어디 계실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자기처럼 예수님 보기 위해 오는 사람이 또 있을거라 생각하니까 해가 저물자 마자 예수님 계신 곳으로 달려간 거죠. 지금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와 안드로 형제 집에 머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던 것을 고쳐 주셨어요. 그래서 지금 병이 다 나아 다시 건강해진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 수중 들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이 집 앞에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밀려온 거에요. 33절 보시겠어요? “(막 1: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아마 이렇게 베드로의 집이 인산인해를 이룬 적은 없었을 거에요. 입추의 여지가 없도록 베드로의 집 주변을 사람들이 가득 매웠습니다. 뭐 하려고요? 예수님 보려고요. 예수님 만나려고요. 이 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때가 어느 때입니까? 낮입니까? 밤입니까? 해가 저문 밤 입니다. 오늘 날처럼 전기가 있고 전구가 있던 시절이 아니에요. 길거리에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 컴컴한 시골입니다. 사람들이 들고 온 횃불과 베드로의 집 안을 밝히는 초만 이 어둔 장면을 밝히고 있었겠죠. 즉 이제 하루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가까웠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 가르치시느라 이미 피곤하셨을 거에요. 귀신을 내어쫓는 일도 하셨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도 고쳐 주셨어요. 해가 저물었다. 가게로 말하면 영업 끝나고 문 닫은 시간이에요. 예수님도 주무셔야죠. 예수님도 열심히 일하셨는데 이제 그만 쉬셔야죠. 자, 그런데 우리 예수님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사람들 다시 집으로 돌려 보내셨을까요? 아니요 예수님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34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막 1: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 온 사람들을 한 사람씩 맞아주셨어요. 병이 든 사람이 있으면 그 병을 고쳐 주셨어요. 이 날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신 환자들의 병명이 얼마나 많은지 마가가 다 기록할 수 없어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다시 말하면 온갖 환자가 다 왔다는 거에요. 두통이 심한 사람, 치통으로 고생하는 환자, 류머티즘 환자, 암환자, 녹내장 환자, 복막염 환자, 절름발이, 아토피 환자, 풍 맞은 사람… 등등 우리에게 익숙한 수 많은 질병을 겪고 있는 환자들이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 날 귀신들린 사람들을 다 고쳐 주셨어요. 무당 찾아가서 굿도 해보고, 비싼 부적도 붙여보고, 세상에 할 수 있는 거 다 해봐도 꼼짝도 안던 귀신들이 예수님 앞에서 하나 같이 벌벌 떨며 도망 쳤어요. 얼마나 대단한 사건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고자 합니다. 의사 선생님이요. 밤 늦은 시간에 자기 집에 직접 찾아온 손님 5 사람만 있어도 그 날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몇 명이나 찾아왔어요? 32-33절 기억 나시죠? (막 1:32)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막 1: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성경은요 웬만하면 숫자 다 세는 편입니다.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 숫자도 153 마리로 세는 게 성경이에요.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더라.” 성경은 숫자를 기록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마가는 ‘많은 병자들’, ‘많은 귀신들린 자들’이라고 했어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온 것일까요? 그럼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일일이 맞이해서 치료해주시고 고쳐주신 예수님은 얼마나 늦은 시가까지 일 하셨을까요? 정말 늦은 밤까지 일하셨을 거에요. 밤이 깊어져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예수님 이 밤에 자기를 찾아온 그 수많은 백성들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다 고쳐 주셨어요. 이게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케치하고 싶은 내용은 바로 그 다음 내용입니다. 예수님 정말 피곤하셨을 거에요. 아마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드시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엄청난 밤을 보냈으면 다음 날은 늦잠도 자고 그러시지 않았을까요? 베드로 집안 사람들도 전날 긴 사역으로 인해 피곤하신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실까봐 조심조심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35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새벽 오히려 미명에…” 미명은 언제에요?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이에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 온 세상이 컴컴한 그 시간입니다. (누가 새벽예배 만들었나? 예수님이 만드셨지!) 그 때 예수님은 오히려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35절 보니까 무엇하시려고요? 기도하시려고…
오늘 마가는 이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아무리 사역으로 바쁘다고 해도, 아무리 할 일이 많다고 해도 뭐는 쉬지 않으셨어요?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은 사역 보다 기도를 늘 우선적으로 하셨어요. 36-37절 보세요. “(막 1: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막 1: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거죠. “예수님 예수님 지금 이렇게 한 적 한 곳에서 한가하게 계실 시간 없어요. 지금 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오시기만 기다리세요!” “집사님 집사님 지금 기도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집사님을 찾는 일들이 저렇게 많은데?”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아무리 바빠도 늘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을 먼저 찾는 시간을 꼭 가지셨습니다. 언제요? 새벽 오히려 미명에… 무슨 말입니까? 남들은 절대로 기도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에… 누가 봐도 새벽에 나가서 기도할 수 없을만큼 피곤한 분인데… 누가 봐도 이 시간 만큼은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쁘신 분인데… 그래도 예수님은 기도하러 가셨어요. 하나님 만나는 시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 하늘의 음성을 듣는 시간, 내 영혼의 나침반을 다시금 주님께 고정하는 시간, 세상 속에서 풀어진 내 영혼을 다시금 조율하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새벽 정말 잘 나오신 거에요.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피곤해도 기도의 자리를 꼭 사수하십시오. 예수님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사셨어요. 예수님은 일에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라, 기도로 사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삶을 사셨어요. 늘 바쁘게 쫓겨 다니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기도로 삶을 다스리십시오. 기도를 삶의 최우선에 놓으십시오. 한적한 곳에 가서 하나님과 교제 하십시오. 늘 은밀히 보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 그리고 크신 은혜를 주십니다. 바쁜 일상 중에도 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