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사도 바울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 로마 제국에는 노예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노예는 비록 사람이지만,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하나의 물건처럼 여겨졌습니다. 로마 제국 곳곳에 노예를 사고 파는 시장이 따로 있었고, 전쟁에서 포로로 끌려온 사람, 국경 지대에서 잡아온 이방 종족 등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편지의 수신자이자, 골로새에서 가정 교회를 하고 있는 빌레몬에게도 노예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노예의 이름은 ‘오네시모’ 였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재산을 몰래 훔쳐 달아 났습니다. 당시 주인을 몰래 떠나 도망친 노예들은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오네시모처럼 주인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노예가 다시 붙잡혀 온다면 그는 끔찍한 고문을 죽을 때까지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도망친 오네시모… 그런데 오늘 편지를 보낸 바울이 그 오네시모에 대해 언급하는 글을 전해 왔습니다. 핀지를 읽던 빌레몬이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9-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몬 1: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몬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지금 편지를 보내는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던 중 바울이 전한 복음이 주인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노예 오네시모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오네시모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10절에 바울이 오네시모를 가리켜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입니다. 바울은 종종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사역을 돕는 이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디모데’, ‘디도’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오네시모의 케이스는 특별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주인의 재산을 훔친 도둑이라는 사실과 그가 현재 도망 중인 노예라는 때문 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통해 변화된 오네시모를 그가 지은 죄나 그의 신분으로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역시 디모데, 디도와 같이 자신이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특별히 10절에 ‘낳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 말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즉 전에는 주인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도둑 오네시모였으나, 이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새로워진 존재가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죠.
사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서를 보낸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에서 가정 교회를 열심히 하고 있는 빌레몬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의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해주기를 간구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이를 명할 수도 있었으나, 빌레몬 정도 되는 성숙한 자라면 분명 이러한 바울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8-9절에 보면 “(몬 1: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몬 1: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라고 말하는 것이죠. 여기서 사용한 ‘간구하노니’라는 말은 당시 문화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반대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권위도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자신의 형제처럼 받아들이는 이 일이 권위나 힘으로 강제적으로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빌레몬 정도 되는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라면 분명 오네시모를 용서해줄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명령이 아닌 간청의 편지를 그에게 보낸 것이죠. 9절 보면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 했습니다. 빌레몬이 경험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하여 오네시모를 용서해주기를 간청합니다.
11-12절을 보겠습니다. “(몬 1:11)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몬 1:12)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노예 오네시모는 주인의 재산을 훔치는 자였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오네시모’라는 이름 자체의 뜻이 ‘유익한 자’라는 데 있습니다. 이름은 유익한 자였는데 그의 삶은 도리어 무익한 자였습니다. 더 나아가 주인의 돈을 훔쳐 달아났으니 주인에게 해를 끼치는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처럼 오네시모는 참으로 ‘유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회심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이전에는 눈가림 식으로 주인이 볼 때는 잘하고, 주인이 없을 때는 농땡이 부리는 노예였을 것입니다. 양심을 속이고 주인의 것을 몰래 도둑질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믿음이 오네시모를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를 주로 모신 뒤 그는 순종과 봉사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이제는 유익한 자가 되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처럼 극적으로 변하는 거이 과연 가능할까요? 저는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사도 바울도 그 증거 입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 무익하던 자가 도리어 이제는 앞장서서 예수를 증거하는 유익한 자가 된 것이죠. 바울은 그 누구보다 사람의 변화를 몸소 체험한 사람이기에 복음을 통해 나타난 오네시모의 삶에 일어난 급진적인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12절에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심복’으로 소개했습니다. 여기서 ‘심복’이란 말은 본래 ‘창자’ 혹은 ‘내장’을 의미하는 단어 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창자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만큼 끓어 넘치는 사랑으로 바울이 오네시모를 아끼고 친자식처럼 그를 대해주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비록 노예였으며, 주인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노예 였지만, 지난 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 자신을 섬기고 있는 오네시모를 바울은 특별한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대해준 것이죠.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노예임을 알고서는 그를 다시 빌레몬에게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비록 지금 오네시모가 자기의 편의를 위해 수고해주고 있고 잘 섬겨주고 있으나, 본래 주인인 빌레몬의 허락 없이 그를 자기 곁에 두는 것이 옳지 않은 결정임을 바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13-1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 (몬 1:13)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몬 1: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이 지난 날 저지른 죄에 대하여 용서해 줄 것과 그를 형제처럼 다시 받아줄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또한 오네시모를 다시금 바울에게 보내주어 바울을 돕게 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기대한 사랑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참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16절을 한 번 보시겠어요? “(몬 1: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시겠어요? 내가 밤잠 줄여가며 새벽부터 일해서 모아 둔 돈이 있습니다. 아들 결혼할 때 결혼 지참금으로 줄 돈이었어요. 아니면 아내 수술비로 쓸려고 모아 둔 돈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이 그 돈을 들고 타주로 도망을 가서 잠적해 버렸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내가 잘 아는 목사님께 편지가 왔는데, 그 도망친 직원이 지금 목사님하고 같이 지내고 있다는 거에요.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이번주에 비행기타고 다시 시카고에 온다는 거에요. 그러니 그를 용서해주고 그를 가족처럼 잘 대해준 다음에 다시 목사님 계신 곳으로 잘 배웅해주라고 편지가 온거죠.
제가 한 번 상상해 보았어요? “만일 내가 빌레몬이었다면 이 편지 받고 기분이 어떠했을까?” 여러분이 빌레몬이었다면 어떠셨을 것 같으세요? 제가 빌레몬이었다면 기가 막혔을 거에요. 아니 내 피 같은 돈 갖고 도망친 노예를 용서해주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그를 형제처럼 잘 대해주라니… 이게 웬 말이에요? 한 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빌레몬이 이 정도 부탁을 들어줄 정도로 바울에게 신뢰를 받는 성숙한 사람이었나? 그러나 빌레몬도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용서가 쉽겠습니까? 그도 이 편지를 받고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요?
교회 오래 다니는 분들 중에도 용서하지 못하는 분들 많이 봤어요…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열심히 보고, 교회 생활 다 잘 하는데 정작 ‘용서’를 못해요… 그래서 평상시에는 천사 같다가도 그 사람 이야기만 나오면 목소리부터 달라지고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눈썹에 인상이 생겨요. 신앙생활 하면서 다른 건 다 하는데 ‘용서’를 못해요… 가슴에 늘 칼을 한 자루 품고 생활하는 거죠. 그런데 참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때 같은 교회를 섬기던 사람인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거에요… 세상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찬양하고 예배 드리던 그 집사님, 그 권사님, 그 장로님, 그 목사님이 너무 싫고 용서가 안되는 거에요.
바울은 빌레몬에게 용서의 사랑을 구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피해를 입히고 재산을 훔쳐 달아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빌레몬서가 성경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이 바울의 목소리가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소리라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 가슴 안에 아직도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오네시모와 같은 이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아직도 그들을 향해 미움의 칼. 분노의 칼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해주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의 영적인 성장, 그의 영적인 축복은 거기서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했다면 그는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더 큰 차원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바운더리는 어디까지였습니까? 2019년에 사랑의 바운더리를 더욱 넓히십시오.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관계를 변화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