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햇볕이 잘 비취는 것이 중요 합니다. 햇빛이 없는 곳에서 식물이 자라날 수 없습니다. 빛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햇빛이 강하게 비추는 곳에는 곰팡이가 피지 못합니다. 햇빛을 우리 몸에 더러운 것들을 죽이는 작용을 합니다. 예를 들면 진드기가 있는 베개를 햇볕 좋은 날 밖에 두면 진드기가 다 죽습니다. 햇빛이 살균작용을 하는 거죠. 빛은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존재 입니다. 빛이 없으면 인간은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자신을 소개 하셨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곧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심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곧 빛의 자녀인 셈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두움의 자녀처럼 살 것이 아니라,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가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본문 8절에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9절에 다음과 같이 정리 했습니다. “(엡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이 말은 빛으로 살아가는 자에게는 반드시 착함, 의로움, 진실함 이 3가지의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이죠. 이 3가지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착함’이란 말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대한 마음을 갖는 자세를 말합니다. 세상에는 성질이 못된 사람도 있고, 속 좁은 사람도 있습니다. 남에게 쉽게 화를 내며 성질을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잘 품어주지 못한 옹졸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빛의 열매를 가진 사람의 마음은 넓습니다. 그가 품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정말 넓은 마음을 가지고 계셨고, 그 분은 다양한 사람들을 품어 주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사람들은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욕하고 미워하던 삭개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시며 그의 집에 유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들에게도 관대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인 우리들도 다른 이들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너그럽게 용서하고 품어 줄 수 있는 착한 마음, 즉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의로움’이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서 자신이 가진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는 다니지만, 신앙인의 의무는 저버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과 밖의 모습이 너무도 다른 경우들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하고 얌전하게 앉아 있지만, 세상에 나가면 할일 못할 일, 할 말 못할 말 구분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갑니다. 심지어 교회는 다니지만,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한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 관계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사랑과 섬김 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우선시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아야할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욕 먹고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이러한 경우가 바로 하나님 보실 때 불의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성실하게 다할 때 그것이 두 번째 빛의 열매인 ‘의로움’ 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말과 행동을 통해 빛의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셋째로 ‘진실함’입니다. 실제로 기독교 역사를 살펴 보면, 한 때 영국의 한 마을에서는 가게에서 새롭게 일할 직원을 뽑기 위해서 면접을 볼 때, 이력서에 ‘000 교회 집사’라고 적혀 있으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신뢰할 수 있다고 믿고 그 사람을 취직 시켜주는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즉 교회 집사는 세상 사람들도 믿고 무언가 맡길 수 있을 만큼 존경 받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떻습니까? 저 사람이 교회 다닌다고 해서 그에게 특별한 기대를 잘 하지 않습니다. 회식 자리 가서 다들 술 마실 때 “저는 교회 다녀서 술 못 마십니다” 하고 거부하면, “야, 내 친구도 000 교회 장로인데 술 먹고 할 거 다 하더라.”는 말은 너무 자주 듣지 않습니까? 이미 교회 다니는 사람도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는 것이죠. 어느 교회는 교회 권사님이 계모임 계주하다가 돈을 들고 잠적해서 교회가 왈칵 뒤집혔습니다. “세상에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권사님이!” 이게 한 두 교회 일이 아니에요. 어느 교회 집사님은 회삿돈을 횡령하고… 또 어느 교회는 교회 재정부 안수 집사님이 헌금을 횡령하고… 뭐 이런 일들은 이제 하도 비일비재하여 세상도 기독교인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별 기대를 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것에 대해서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은 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만성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빛의 자녀인 우리들은 ‘진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이와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도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우리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빛의 자녀들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착한 행실로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이 바로 그 내용 입니다. 사랑에 빠진 청년은 상대방에게 무슨 선물을 주면 좋아할까, 손 편지를 쓸까, 꽃을 사다 줄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이 좋아하는 그 여학생을 기쁘게 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합니다. 빛의 자녀들도 이와 비슷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실까?”하는 고민이 그 삶에 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을 때도, “내가 이 길을 선택하면 하나님이 기뻐 하실까? 아니면 저 길을 선택하는 것을 더 좋아 하실까?”하는 이런 하나님 중심의 질문이 먼저 떠오릅니다. 이전에 미국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WWJD Movement”라는 이름의 운동이 있었습니다. WWJD는 “What would Jesus do?”의 약자 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작가 찰스 쉘돈이 지은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 제목의 약자 입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사람들은 “만일 예수님이 내 상황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렇게 하셨을까? 저렇게 하셨을까?” 진중한 질문을 하며 그 질문에 답을 따라 살아가려고 양심의 거리낌 없이 최선을 다한 운동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물어보는 자세 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가장 기뻐하실까? ‘이 일을 주님께서 정말 기뻐하실까?’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빛은 열매를 맺습니다만 어둠은 열매가 없습니다. 열매가 맺어도 부끄러운 열매만 맺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11절 말씀을 통해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합니다. 13절에 보면 “(엡 5: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13절 말씀은 읽어도 조금 해석이 햇갈릴 수 있습니다만,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이 어두운 고에서 은밀하게 지은 죄들이 결국에는 빛 앞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며 환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라는 경고 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의 날이 이르면 모든 잠자는 자 곧 죽은 자들도 다 깨어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어둠 가운데서 행한 은밀한 죄들을 다 심판 받게 됩니다. 그 말씀이 바로 14절 입니다.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 세상에서 어둠 가운데 은밀한 죄들, 부끄러운 죄들을 다 버리고 착함, 의로움, 진실함으로 나타나는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라고 권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