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16 하나님을 본받고 사랑을 행하라 (에베소서 5장 1-7절)

어느 집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붕어빵처럼 닮은 가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알려주지 않아도 저 두 사람이 부자지간이구나 하고 알아볼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와 딸이 외모나 분위기가 비슷한 가정도 있지요. 이처럼 가족은 서로 닮기 마련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외모만 닮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투와 행동도 닮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면을 닮아가야 할까요? 2절을 보겠습니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이해 자기 목숨까지 다 버리셨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라고 말했을 때, 그는 세상적인 기준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맘에 드는 사람들은 잘 대해주고,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멀리합니다. 또한 아무리 자기 맘에 드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내 자신이 희생하거나 손해를 봐야하는 경우, 그러한 희생을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 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죄를 짓고 또 짓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연약하고 악한 우리들이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제 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기대하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 거저 받은 사랑이니 우리들도 상대편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유익이 될까 따지지 않고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는 모습들도 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엡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3절은 우리가 성적인 죄를 짓지 말도록 주의할 것을 당부합니다. 성적인 죄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 중 하나 입니다. 이러한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고 하나님의 분을 사게 합니다. 민수기 25장을 보면 바알브올과 음행을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려 2만 4천명이 한 날 한 시에 죽었습니다. 이 사건 하나만 봐도 하나님께서 음행을 얼마나 싫어하시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음행이나 다른 성적인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3절에 나오는 ‘온갖 더러운 것’은 마음을 더럽히는 것들을 말합니다. 남을 속이는 일, 부정직하게 행동하는 일, 양심을 더럽히는 것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3절에 보면 ‘탐욕’도 경계하고 있습니다. ‘탐욕’이란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께 주신 것들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막아 버립니다. 자신은 덜 가졌기에 불행하며, 자신이 이렇게 불행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더 채워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란 논리에 빠져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을 갖게 됩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탐심’을 ‘우상숭배’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탐심의 정체가 하나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더 갈망하게 만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음행,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이 세가지는 우리 가운데서 그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입에 담지도 말라’는 거죠.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버려야 할 3가지 입니다. 이러한 죄들을 품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 적합하지 못합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엡 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여기서 ‘누추함’이란 것은 음담패설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본들을 보면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말 역시 저속한 농담, 성적인 농담 등을 가리킵니다. ‘희롱의 말’은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거나 거칠게 대하는 언어생활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입술에서 이러한 말들이 제거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대신에 우리 입술에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감사하는 말” 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소리 내어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한 적은 언제 입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탐욕을 품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음행을 행하는 자, 마음에 더러운 것이 있는 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쉬워 보여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줄 아는 마음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누리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만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앞서 이야기한 음행, 더러운 것, 탐심을 버려야 할 강력한 이유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 (엡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 무슨 말입니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그럼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음행을 하는 자들, 더러운 자들 즉 양심을 속이는 자들, 부정직하게 살아가든 자들 입니다. 탐심을 품은 자 는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곧 우상 숭배하는 자 입니다. 이 사람 또한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음행, 더러운 것, 탐욕을 버려야 할 이유에 대해서 언급하며, 이러한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성도들을 꾀는 거짓교사들이 존재 했습니다. 이들은 육신은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육신은 아무렇게 해도 괜찮다고 성도들을 유혹했습니다. 음행을 저질러도 되고, 더러운 일을 행해도 어차피 육신 자체는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마음대로 육신의 욕구를 채우며 살아도 된다는 이런 거짓 교사들의 꾐에 넘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저버리는 일들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마치 민수기 25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브올에게 빠져 음행을 저지르다, 하나님의 진노를 당한 것처럼, 저들 역시 육신의 음행과 마음 속 탐심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내에 찾아오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주의할 것에 대해서 6-7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엡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엡 5: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야 합니다. 음행과 온갖 마음을 더럽히는 것과 탐심을 버리고, 우리 입술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채우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