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2 성도들을 향한 깊은 관심 (빌립보서 4장 21-23절)

초대 교회는 성도 서로간의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을 팔아 필요한 성도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고, 기쁨 속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초대 교회의 이런 사랑 넘치는 교제는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교회를 만들었고, 교회 안에는 빈부나 계층, 남녀 노유의 차이를 초월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교회라고 해서 다 좋은 교회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를 기억 하십니까? 교회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었습니다. 성찬식 전에 각자가 준비한 음식을 나누는 시간에 부자 성도들은 가난한 성도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지 않고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 결과 가난한 성도들은 굶고 하나님의 교회는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랑의 교제가 식어지면 큰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증오보다 더 나쁜 것은 무관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야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만일 성도가 서로 돕지 않는다면 교회는 늘 사단의 세력에 패배하는 연약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함께 건강해지고 함께 자라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깊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21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고 말한 것은 서로를 향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로마 교회의 성도들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서로 교제할 수 있도록 권면 했습니다. 우리 교회만 잘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옆에 교회도 잘 되어야 합니다. 요즘에는 교회 이기주의가 많습니다. “내 교회, 우리 교회만 잘 되면 된다! 옆에 교회가 망하면 우리 교회 성도들이 더 늘어나니까 좋은 것이다!”하는 식의 마음이 근저에 깔려 있어요.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그 숫자가 많아지다 보니까 교회들이 서로 경쟁하고 성도를 데려오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거에요. 한국은 지금 신도시가 개발되면 그 앞에 편의시설들이 들어옵니다. 식당도 들어오고, 문방구도 들어오고 마트도 들어옵니다. 그 숫자가 가장 많은 것이 편의점입니다. 그런데 어느 신도시에는 이 편의점 숫자보다 교회가 더 많은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다 개척교회에요. 어떤 상가에는 지하에 교회, 1층에 편의점, 2층에 교회인 곳도 있어요. 어떤 상가는 한 건물에 교회가 3개인 곳도 있습니다. 사정이 어렇다 보니 교회 안에서 경쟁이 치열합니다. “누가 더 오래 버티나? 어느 교회가 끝까지 살아남나? 너가 사나 내가 사나 해보자!” 교회들끼리 생존경쟁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옆 교회가 문을 닫고 간판을 내리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해요. “저 교회 다니던 성도님들이 이제 우리 교회 오겠구나!” 이러한 한국교회의 현실이 담긴 뉴스 기사를 보았어요. 참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초대 교회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어서 교회가 어려워지자, 유럽에 위치한 다른 교회들이 헌금을 거두어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도와주었어요.
우리도 다른 나라에 지진이나, 스나미 같은 자연 재해 오면 헌금을 통해 그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돕기도 합니다. “아, 저 교회 성도님들 이번 지진으로 얼마나 힘들까? 교회 건물도 없는데 예배는 어떻게 드리지?” 관심을 가지고 긍휼한 마음으로 대합니다. 그러나 정작 같은 도시에 있는 교회들, 서로 가까이에 위치한 교회들에 대해서는 무관심 합니다. 오히려 서로 경쟁하듯 교회를 대할 때가 참 많아요. 그러나 실로 이것은 잘못된 태도 입니다.
전쟁에 참전한 한 뱡사가 같은 국적을 가진 옆 부대가 적군의 포탄에 맞아 부대 진영에 불이 훨훨 타오르는데, “야 그거 참 잘 되었다! 우리 부대에는 저런 일이 없어 다행이야”하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병사는 자기 아군도 못 알아보는 것 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 입니다. 내가 등록해서 섬기고 있는 교회든, 옆에 있는 이웃 교회든 교회에 어려움이 찾아오면 그것은 강 건너 불구경 할 일이 아니라, 내 교회 일처럼 여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21절에 말합니다. “(빌 4:2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문안이라는 말은 단순히 인사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줄 수 있는 필요는 없는가? 우리가 저 교회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없는가? 사람이 필요한가? 우리 중 누군가를 저 교회를 위해 파송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물질적인 필요가 있는가? 모금을 통해 물질적으로 도와주어야 하는가? 이런 깊은 관심을 가지고 로마 교회와 빌립보 교회가 서로 유기적인 교회가 되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수년 전부터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여름마다 해외로 선교가는 교회 청년들의 선교 방향을 국내로 전환 했습니다. 이제는 산골에 있는 교회, 섬에 있는 교회, 시골 교회를 갑니다. 비행기타고 바다 건너 가서 사역하는 것만 선교라고 생각했었지, 같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교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거에요. 갈수록 한국도 국내선교에 참여하는 교회들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멀리 있는 선교지는 챙겼는데, 알고보니 옆에서 죽어가는 교회들을 놓치고 있던 거에요.
시골교회에서 어렵게 목회하고 계시는 목사님들 찾아가서 함께 예배 드립니다. 평상시 인력이 없어 고치지 못하던 교회 낙후시설들을 고칩니다. 비가 새는 천장을 고치고, 교회 담벽에 아름다운 벽화를 그립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없는 교회에 대형교회 청년들이 가서 여름 수련회를 열어줍니다. 교회는 서로 도울 때,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때 함께 건강해지고 함께 자라는 교회가 됩니다.
복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역도 교회를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22절 보시겠어요? “(빌 4: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니라” 가이사 집 사람… 황실의 친족입니다. 왕가 사람들이에요. 이 당시 누구보다 예수 믿던 사람들을 핍박하던 시저의 집안 사람들인 거죠. 혹은 그와 밀접한 로마의 고위 관리들이 다니는 교회였어요. 그러나 복음은 사람 가라지 않고 찾아갑니다. 쳘벽과 같은 로마 황실에 복음이 들어간 거에요. 복음은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평민이나 귀족이나 노예나 왕족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구분하지 않아요. 이 당시 로마는 가장 타락한 도시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얼마나 편견이 많았겠어요. 게다가 가이사 집 사람들이라뇨… 그러나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로마 교회를 향해 그들과 손을 잡고 사랑의 포옹을 할 수 있도록 권면 했습니다. 복음을 나눌 대상을 제한하지 않는 거에요. “저 사람이 정말 예수 믿을까? 저런 사람은 복음 전해도 안 될꺼야.”하지 말라는 거에요. 사람 차별하지 말고 끝까지 깊은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혼에 은혜가 마르면 감사가 사라져요.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혼에 은혜가 쌓이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자를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성도들을 향한 깊은 사랑과 관심을 서로를 돌보는 성숙한 믿음과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