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강한 역사로 빌립보 교회는 나날이 영적으로 숫자적으로 부흥케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후 그 어떤 교회보다 사도 바울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는 든든한 동역자 교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빌립보 교회는 손수 사람을 보내어 바울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걱정하고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해 편지를 기록하여 디모데에게 전달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빌립보서 입니다.
이 짧은 편지의 마지막 결론이 바로 4장입니다. 4장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4:1). 이 1절에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의 목회관이 들어 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는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였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형제들’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필라델피아’입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형제애’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만 생각만해도 기분이 좋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들이 보고 싶었고 그리웠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단순히 서로 좀 친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피를 나눈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이 얼마나 보기 좋은 광경입니까?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바라 볼 때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듯 형이 사랑하는 동생을 바라보듯 대했습니다. 또한 1절에 보니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척 보고 싶다. 그립다!”라는 뜻입니다. 목회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직장 일 하듯이 성도들을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달랐습니다. 복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낳아 가르치고 삶으로 모범을 보이고 그들 가운데 문제가 생기면 찾아가서 어루만져 주고 하면서 자식처럼 키워낸 성도들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한 가족과 같은 눈물겨운 존재들입니다. 단순히 그가 목회자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리운 형제처럼 빌립보 성도들이 잘 지내는지 그 안부가 늘 궁금하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가리켜 ‘나의 기쁨’이이라고 고백 했습니다. 성도들 얼굴 떠올리고 이름만 불러봐도 좋은 거에요 또한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가리켜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면류관은 ‘자랑거리’라는 말입니다. . 성도들이 잘 되는 것이 곧 내가 잘 되는 것이며, 그들의 행복이 곧 내 자신의 행복이라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기쁨이자 자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처럼 성숙해 보이는 교회라 해도, 바울의 기쁨과 면류관이라 불리는 좋은 교회라고 해도, 그 교회에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문제 없는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빌립보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2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4:2). 빌립보 교회에는 여자 성도들의 주도권 싸움이 있었습니다. 요즘 교회도 보면 장로 두 사람이 서로 편 갈라서 싸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도들이 서로 “당신은 어느 장로 편입니까?” 이렇게 다투곤 합니다. 이 당시 빌립보 교회의 특징은 여성 리더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본래 이 당시 사회에서도 여성들의 권위나 리더십을 많이 인정해 주었던 때입니다. 빌립보 교회도 많은 여성들이 리더십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여자 리더 사이에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져 문제가 생겨버린 것입니다. 유오디아 권사와 순두게 권사 두 여자가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이 두 사람이 처음부터 이렇게 서로 못 잡아 먹던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바울 목사님을 돕고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말도 안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두 사람의 생각이 많이 달랐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서로 일하다가 서운했던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서 한쪽이 먼저 폭발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지금 이 두 리더십의 분열로 인해 교회 전체가 시끌벅적 해졌습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냥 일반적인 명령으로 끝낼 수도 있었는데, 그는 굳이 이 두 여인의 이름을 언급하여 불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이 두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는 이들이 복음에 함께 힘쓰던 여인들이라고 했습니다(3절).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하던 자매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진리에 있어서 다른 견해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열심과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 마음을 품지 못하고 마음이 갈라선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 되지 못해서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고 있었습니다. (일 때문에 사람을 놓치지 말아라) 일 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 혼자 열 걸음 먼저 가지 말고, 한 걸음 덜 가더라도 함께 한 걸음을 가라 // 걸음이 느린 사람이 있는가? 기다려줘라.
교회는 예수님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으로,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하나됨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미 교회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한 팀입니다. 이 하나됨을 지키는 것,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같은 마음을 품고 하나될 수 있을까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유익만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유익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 가치관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개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한 것은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신의 권리를 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갈등이 있을 때 내가 잘못한 것도 인정하지만 그가 더 잘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두 자매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저 사람이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마땅히 취해야 할 권리이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될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 즉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1절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주안에 서라”고 말하였습니다.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가장 깊은 사랑이 담긴 간절한 메시지 입니다. 적의 어떠한 공격을 받고 있더라도 결코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우리가 길을 벗어나기를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상선수들이 자기 트랙에서 벗어나면 실격을 당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트랙에서 벗어나면 실격을 당합니다. 사탄은 그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트랙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어디에 서 있는가’입니다. 어디에 서있으라고 합니까? ‘주 안에서’ 굳게 서있으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이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항상 주와 동행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 안에서 있지 않기 때문에 조그만 시험과 시련에도 쉽게 흔들리고 무너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 몇 마디 말에 쉽게 상처를 받는 것은 ‘주 안’에 서있지 않고 ‘내 자존심’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형편에 따라서 신앙생활의 열정이 쉽게 식어버리는 것도 ‘주 안’에 서있지 않고 ‘상황’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그렇고, 우리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안에 설 때에만 굳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이 “주 안에서”라고 쓰는 이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주 안에 서기보다 세상의 가치관, 내 소견에 옳은대로, 내 감정이 요동 치는대로 움직이는 때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학자들은 이들이 빌립보 교인들 중의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며 교회 창립멤버라고 추측 합니다. 그들은 각각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 일에 정말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의 열심이나 헌신에 있어서 어느 한쪽이 기울면 차라리 다툼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그렇게 똑같이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두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갈등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한쪽도 양보하거나 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서로 고집하면 작은 문제가 결국 큰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나중에는 감정싸움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여기에서는 교회가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양보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들을 향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내가 순두게를 권하노니….각각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한마음의 비밀입니다.
이미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이 두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으라.’(빌2:2)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함께 가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것입니까?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만일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이 마음을 품고 신앙생활 했다면 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났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열심히 합니다. 교회 봉사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헌신적으로 교회 일을 합니다. 그런데 낮아지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져야 하고, 언제나 자기주장이 관철되어야 합니다. 자기는 언제나 옳고 다른 사람은 언제나 틀립니다. 아무리 그런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만 그러면 교회에서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람이 한 사람 더 생겨나면 그 때부터 교회가 삐그덕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열심보다도, 헌신적인 봉사보다도, 어떤 마음을 품느냐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품는 신앙의 열심이 자기고집을 끝까지 세우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주님처럼 낮아지며 하는 봉사가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교회에 덕을 끼치는 일이 무엇인가를 제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가 좀 손해를 본다고 체면이 손상된다고 그것 때문에 교회를 시끄럽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없어서 불협화음이 생겨나고 갈등과 다툼과 분쟁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2-3절 말씀을 다시 해석해 해보겠습니다. “유오디아 순두게 두 분에게 나는 간청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한 마음이 되십시오. 나와 한 멍에를 멘, 내 진실한 협력자에게 부탁합니다. 이 여자들을 도와주십시오. 이 여자들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느라고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올라있습니다.” (빌 4:2-3)
빌립보 교회 안에서 갈등하고 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문제를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라고 말합니다. 사실 교회에 유오디아와 순두게 같은 사람이 있으면 두 파로 갈라지기도 하지만 이것이 계속되면 이들을 아예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라고 말합니다. 도와주라는 것이 그들을 편들어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서로 갈등하는 데에는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고 싶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홀로 있지 않도록 섬기라는 것입니다. 형제로서 마땅한 사랑을 공급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