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2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삶 (빌립보서 2장 13-18절)

13절 말씀에 나오는 ‘행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네르게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영어의 Energy가 여기서 파생된 단어 입니다. ‘에너지’ 곧 행동하는 힘 입니다. 따라서 13절 말씀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주님의 의도와 목적과 뜻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붙잡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도록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역사하고 계십니까? 마치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십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녀를 향해서, “애야, 엄마 아빠가 너를 낳아주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너가 알아서 혼자 세상을 살아가렴” 하고 말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정말 가난한 상황이나 어려운 환경에 처한 경우는 몰라도 웬만한 부모라면, 내 자녀를 위해서 최대한의 지원을 해주고 싶은 마음의 소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 자녀에게 음악적 소질이 있다면 소원을 가지고 음악을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애를 씁니다. 돈이 모자르면 자신이 허리 띠를 졸라매도 밤 늦게까지라도 일을 더해서라도 레슨비를 마련해 주고 싶은 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심정입니다. 특별히 부모 중에 자녀가 운동을 하거나 음악을 하거나 미술을 하는 자녀를 둔 부모는 희생이 많습니다. 박지성 선수의 아버지는 아들을 축구선수로 만들려고 회사를 그만두고 아들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김연아 선수의 어머니는 자신의 삶도 포기한 채 딸에게 거의 모든 시간을 투자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식 키우느라 부모 자신의 꿈과 인생은 없어질 때도 있습니다. 자녀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은 게 부모 맘이죠.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부모는 자녀를 바라보며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소원’을 두고 자녀를 키웁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실 때 ‘소원’을 가지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이 세상 부모들의 방법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항상 평안하고 행복한 환경 속에만 있으면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을 것 같은 광야로 데려 가십니다. 그곳에서 고난을 겪으며 머리 속 논리고 이성이고 체면이고 다 던지고 “하나님 나 좀 살려주세요!”하고 하나님께만 매달리기 시작 할 때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광야의 경험,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배워가게 됩니다. 자녀가 고난 당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프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빌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원망은 다른 말로 하면 불평입니다. 원망의 뿌리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있습니다. 만일 지금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과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불신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누군가를 탓하거나 원망치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삶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앞서 12절에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고 나서 14절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고 했을까요? 구원을 받은 자는 반드시 ‘광야학교’에 입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나니 마실 물이 없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애굽 나오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줄 알았는데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는 죽음의 땅 광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삶도 이와 비슷합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가 걸어가야 할 땅이 바로 세상의 광야 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훈련 계획이 바로 이 광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 없이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 받은 백성들에게 주님의 거룩하심과 아버지 되심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풍성함을 삶으로 경험하게 하시기 위해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이란 광야를 통과하며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성숙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15절 말씀에 하나님의 이 놀라운 계획이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5절을 보니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와 같은 척박한 삶의 길로 몰아넣으시는 의도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홈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순전하다’라는 표현은 불순물들이 섞이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헬라어로 보면 본래 이 단어는 “물을 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 글을 쓴 당시에 포도주 만드는 산업이 성행했습니다, 포도주의 가치는 순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포도주에 물을 탈수록 가치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순전하다’라는 이 표현은 어떤 것이 일절 섞이지 않은 가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세상의 더러운 불순물이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가득 차 있는 순전한 백성이 되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의 길로 인도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세상 속에서 빛으로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15절에 사도 바울이 ‘빛’이라는 단어를 쓴 의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빛은 환한 불빛이 있는 곳에서는 필요가 없습니다 어두운 곳에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왜 불순물을 뽑아내는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빛 된 자녀로 만들어져야 될까요? 이 세상이 너무나 어둡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는 빛의 자녀로 쓰시기 위해 우리를 고난을 통해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철은 대장장이의 망치를 맞을수록 단단해집니다. 거센 비바람을 견딘 나무일수록 나뭇결이 단단해집니다. 아픔을 경험해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인간 관계 때문에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이,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두운 데 들어가 빛을 비추라고 부르셨습니다
17-18절을 보겠습니다. ”(빌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바울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표현했습니다. 제물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쓰여지고 하나님께 드려져야 가치가 있는 것이 제물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광야의 인생길을 가는 동안 영적인 성숙을 통하여 하나님께 제물과 같이 자가 자신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영적 성숙을 이루어 가도록 광야와 고난의 길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광야에서의 모든 훈련을 통과하여 하나님께 우리의 삶 전체를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주님의 놀라운 계획 안에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남은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릴 거룩한 산 제물로 살아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