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1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빌립보서 2장 12절)


사람은 누구나 나를 평가하는 타인의 시선이 가득하거나 내가 주목 받고 있는 자리에서는 최대한 고상하고 멋지고 훌륭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보지 않는 가까운 관계, 누군가를 의식할 필요가 없는 일상에서는 우리 성품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우리의 진정한 인격이 드러납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나타나는 내 신앙생활이 진짜 믿음의 수준 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앙생활을 할 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 보던지, 내 주변에 아무도 없든지 늘 한결 같습니다. 집에서 아내와 자녀들이 아는 내 모습, 직장에서 동료들이 보는 내 모습, 교회에서 장로님 집사님이 아는 내 모습, 나 홀로 남겨졌을 때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오늘 빌립보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기가 함께 있을 때는 신앙생활 잘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멀리 로마 감옥에 갇혀 그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을 때는 ‘저들이 또 다시 신앙생활이 완전히 무너져서 옛 습관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하고 바울은 염려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항상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 여러분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곁에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늘 힘쓰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성도들 곁에 있든지 없든지 항상 동일하게 열심히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라고 권면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철저하게 훈련해 가야 할 중요한 자세가 바로 “일관성” 입니다. 목회자가 보든지 안 보든지, 다른 성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일관성 있게 열심을 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열심을 내어 협조를 잘 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없으면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자신의 신앙이 미성숙하거나,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것부터 버려야 합니다. 절대로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신앙생활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 저 사람이 나를 거룩하게 보겠지.”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 받으려고 신앙생활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면 결국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신앙도 결코 자라지 못합니다.
12절에 사도 바울은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가짜 신앙생활, 껍데기 신앙생활이 아니라, 진짜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가장 먼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이 없어도, 오직 하나님 앞에서 봉사하고 섬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12절에 한 가지 주목해보고 싶은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마지막 3 단어 입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을 한 번 깊게 생각해 봅시다. 이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받은 것 아닙니까? 그럼 어째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것일까요? 과거 어느 날 우리 인생의 한복판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죄로 어두웠던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여시고 완악했던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게 되었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로 가슴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단 한 번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구원은 되풀이 되지 않는 일회적 사건입니다. 간혹 부흥회 때마다 예수님 다시 영접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것은 구원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일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구원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이제 구원을 받은 자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가야 할 성화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우리에게 도래하지 않은 진정한 구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 받은 자로서의 완전무결한 거룩한 삶이 오늘도 우리에게 성화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동독과 서독이 독일이라는 통일국가가 되었음에도 진정한 의미의 통일국가가 되기 위해서 여전히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과정처럼 우리의 구원도 구원 받은 자의 합당한 모습으로 빚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12절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한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한 순간에 우리의 성격이 변화하고,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사랑이 넘치고 얼굴에 광채가 나는 삶으로 한 순간에 사람이 180도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속였고,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해 사라의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아브라함에게도 거짓과 불신의 요소는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밧세바와 간음을 저질렀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그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신인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나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다워지는 것은 점차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루는데 어떤 마음으로 합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감정은 우리가 공포영화를 보거나 귀신 이야기를 들을 때 느끼는 그런 두려움과 떨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조심스러움을 뜻합니다. 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면 행동거지 하나 함부로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하지 않습니까? 장난기 많은 중학생 아이도 자기가 좋아하는 여학생이 그 앞을 지나가면 갑자기 조심스러워 집니다. 가능하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흠이 안 잡히길 원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을 의식해서 언행이나 생각이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주님을 사랑하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임재의식이 있는지 늘 내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간다는 의미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코람데오’를 사용했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은 늘 우리 앞에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심을 인식하고 사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코람데오의 삶, 보는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이 마음을 가지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