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8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겸손 (2) (빌립보서 2장 5-11절)

‘본체’라는 말은 헬라어로 ‘내적본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가지신 본질을 내적으로 소유하고 계십니다. 신약성경의 핵심내용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는 주장은 모두 틀린 것이며 아무리 유익한 가르침을 전해주어도 결국에는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은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빌립아, 내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도 네가 나를 모르느냐? 누구든지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 입니다. 성경은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 안에 하나님의 본질을 내적으로 소유하고 계십니다.
6절 말씀을 이어서 보니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가지신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존재이시지만, 그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너무나도 중요해서 ‘정통 기독교’와 ‘여호와의 증인’을 나누는 교리의 기준이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단입니다. 이단이라는 말이 비슷하지만 끝이 다르다는 뜻이 있는 것처럼 여호와의 증인도 우리가 믿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유사한 부분을 보면, 여호와의 증인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과 오늘 우리가 말하는 개념은 완전히 다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을 우리 보다는 높은 존재이지만, 하나님보다는 낮은 분으로 애매하게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보다 격이 낮은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교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기에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6절 말씀에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셨다는 이 말을 해석할 때,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질적으로 떨어지고, 신적 존재가 아니다라고 해석해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이단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보다 낮은 존재이다.”하고 주장하는 오해가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7절에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는 이 구절을 잘못해석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사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되시기로 포기하셨다는 말은 결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기독교의 신비는 바로 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자기를 낮추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의 낮아지심은 구유에 태어나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자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낮추시고 하늘의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죄인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8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신학자들 사이에서 일명 ‘위대한 반전’이라고 불러지는 사건이 9-11절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셨습니다. 9절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가장 높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상상하고 추론할 수 있는 그 어떤 지위보다도 더 높은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9절부터 11절을 보면 마지막 묵상의 주제가 나타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자신의 특권과 권리와 소유를 다 포기하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은 세 가지 선물을 주십니다. 첫째, 그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십니다. 둘째는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셋째는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십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까닭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적기 때문입니다. 상급, 보상, 땅에서 삶이 외로운 것은 천국에 대한 그리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천국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세상 일이 그렇게 대수롭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한 묵상, 영광의 면류관에 대한 묵상이 희미 해졌을 때 세상은 각박 해집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날마다 천국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차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의 면류관, 그 상급에 대한 환희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참고,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날 속상하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내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사람을 만나도 보통 때처럼 대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환상, 상급에 대한 기쁨 때문에 그렇습니다. 용서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용서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한계는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끔 ‘얼마나 순종해야 합니까? 어디까지 순종해야 합니까? 이만큼 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라’고 대답하십니다. 순종은 죽기까지 해야 합니다. 용서에 한계가 없는 것처럼 순종에도 한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포기입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시고 인간이 되셨던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예수님 마음의 실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진정한 겸손의 마음을 우리 마음 안에도 동일하게 품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