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27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사랑 (빌립보서 1장 1-2절)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유럽에 세운 첫 번째 교회입니다. 제 2차사도 선교 여행을 떠난 바울은 본래 아시아에서 선교 사역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를 막으셨습니다. 밤에 바울이 자던 중 꿈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와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말을 합니다. 잠에서 깬 바울은 이것이 유럽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입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도처를 찾았습니다. 바울의 말씀을 듣고 옷감 장사를 하던 루디아라는 여인이 회심하고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후 루디아는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후원합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루디아와 간수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물심양면으로 사도 바울의 사역을 후원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만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감사와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다시 한 번 방문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돕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빌립보 교회의 목회자인 에바브로디도가 로마에 있는 바울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의 상황을 전해주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인들 가운데 서로 다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 성도가 서로 파벌을 형성해서 다투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이며 위험한 일인지 경고 했습니다. 따라서 빌립보서 안에는 교회 안에서의 연합을 강조하며 ‘하나가 되라고’ 두 번씩이나 명령했습니다.
빌립보서의 가장 큰 주제는 ‘기쁨’입니다. 상황이 좋고 형편이 좋아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시는 산 소망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는 ‘기쁨’이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현재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잠을 자고 자유조차 빼앗긴 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해야 하며, 우리가 여전히 기뻐할 수 있는 이유들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편지가 그러하듯이 그는 먼저 자신을 소개함으로서 빌립보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1장 1절 말씀을 보면 그는 자신을 무엇으로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 입니다. 바울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빌립보서는 그가 개척한 교회였기 때문에 오늘날로 말하면 “그대들의 원로 목사 바울” 이렇게 뭔가 좀 있어 보이는 듯한 단어로 자신을 소개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가끔 어떤 목사님들 하고 이매일을 주고 받다 보면 꼭 자신의 직책을 강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디 어디 교회 당회장 아무개 목사”, “어디 어디 이사장 아무개 목사” 자신의 직책을 강조합니다. 아무래도 직책을 강조해서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직위와 권력을 은연 중 자랑하고 싶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음만 먹으면 멋지고 화려하게 자기를 소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부르시고 택하신 사도 바울!”, ‘빌립보 교회의 개척자 바울’ 이처럼 얼마든지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여기서 ‘종’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둘로스’입니다. 더 정확한 번역은 ‘노예’ 영어로 ‘Slave’ 입니다. ‘둘로스’는 아무런 소유권이 없습니다. 내 지갑 안에 있는 돈도 다 주인 것입니다. 아니 이 당시 종들은 아예 지갑이 없습니다. 또한 자기 목숨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살라고 하면 살고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 했습니다. 이 종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는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 되었습니다. 종의 모든 소유권은 주인이 갖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인에게 바치고, 주인을 위해 살고 주인을 위해 죽는 존재가 바로 둘로스, 종 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이라 소개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전 존재를 드렸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소유, 내 건강, 내 생명, 내 재능 다 주님의 것입니다. 바울이 종이라 고백한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소유 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는 주님의 절대 소유 입니다.
또한 종은 주인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종은 내가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이거 하라고 하면 이거 하고, 주인이 저거 하라고 하면 저거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은 세상의 종과는 다릅니다. 그는 억지로 종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거 다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억지로 마지못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 되어 자원하여 주님의 종, 둘로스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이런 둘로스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높아지려고 하고, 한 자리 차리 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신앙이 미숙한 사람입니다. 진짜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직분 받는 것을 마치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더 잘 섬기라고 직분을 주시는 것이지, 섬김을 받으라고 직분 주신 것은 아닙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신앙이 무르익을수록 사람들 앞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 늘 저들을 섬기려 하고, 내가 남보다 낮아지는 둘로스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 그대로 ‘사도’였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높은 영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을 보면 교회에서 가장 낮은 자인 것처럼 성도들을 밤낮으로 섬겼습니다. 힘든 사람 찾아가서 그들의 이야기 들어주고, 신앙 상담하고, 병든 자들 방문해서 위로하고 고쳐주고… 바울은 늘 낮은 곳에서 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와 선생이셨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바울도 주님의 모습을 본 받아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이 교회 안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단순히 “아무개 집사입니다.”, “아무개 권사입니다.”, “아무개 장로입니다.” 이렇게 직분으로만 자신을 기억하지 마시고, 그 직분에 주님께서 부르신 둘로스의 정신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공동체로 부르시고 직분을 주신 이유는 서로의 종이 되어, 서로를 섬기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고됩니다. 사람 찾아가는 것, 이야기 들어주는 것, 때로는 내 지갑을 열어서 먹을 것도 사주고, 선물도 주고, 편지도 써주고, 눈물과 아픔을 같이 해주는 것…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섬기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 때로는 이렇게 열심히 섬기고도 상대방으로부터 욕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대해주었는데, 상대방으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을 위해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섬기고 나서 받는 칭찬도 인사도 사실 우리가 받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주님의 일을 하고 나서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노예가 아닙니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몸을 찢어가며 섬겨주신 것처럼 우리들도 내게 맡겨주신 형제와 자매를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전이 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섬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주인이 많은 교회는 분란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주인 삼고 주님을 위한 종이 많은 교회는 평안합니다. 바울의 직분은 사도 였지만, 그의 정체성은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해 성도들의 종이 되어 살았습니다.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종 둘로스가 되시기 바랍니다.
1장 1절 말씀을 다시 한번 봅시다. 빌립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둘로스가 된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입니다. 바울은 수신자를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성도란 단어를 풀어 말하면 ‘거룩한 무리’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떠난다’, ‘구별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생각을 구별하고, 삶의 방식을 구별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빌립보라는 도시에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구별된 사람들이 바로 성도 입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우리가 사도 바울로부터 이 편지를 받았다고 한 번 상상해 봅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리노이 주에 사는 모든 성도들아… 지금의 자신의 생활이 세상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분들은 성도라는 이 호칭이 매우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또한 나름 신앙에 열심을 내는 분들 입장에서 보면 나는 그렇게 불릴 만 할 것도 같은데 옆에 있는 저 사람은 성도라고 불리기에는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비록 부족한 것이 많고 모르는 것이 많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을 성도로 택하여 주셨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는 다녔는데 여전히 신앙이 미숙한 사람들… 제 3자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봐도 참 많이 부족한 사람들… 비록 사람들이 나 자신을 볼 때, 그리고 내 자신이 나를 볼 때 한 없이 부족해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귀하고 소중합니다. 우리 가운데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는 보석처럼 귀한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재능이 뛰어나거나 성품이 성숙한 사람만 골라서 성도라고 말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자기 하나 살고자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복을 받고자 자기 부모를 속였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자기 부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또 자기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흠 많고 부족한 사람들을 오히려 택하시고 그들을 성도로 구별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1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엔크리스토’ 우리는 비록 연약하고 죄가 많지만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그 분 안에서 비로소 성도라 불리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성숙한 사람도 있고 미숙한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이 남보다 조금 성숙 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깔보아서는 결코 안됩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그런 방식으로 대할지 몰라도 교회는 성숙한 사람이 미숙한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께 귀한 존재가 되듯이, 내 옆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는 저분도 주님 앞에서는 보석처럼 귀한 성도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사는 사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은 무엇이 있을까요? 바울은 두 가지 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빌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먼저 은혜를 봅시다. 세상은 부모를 잘 만나고, 줄을 잘 서는 것을 가치 있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의 원리가 아닌 은혜의 원리로 살아감을 강조합니다. 자격도 없고, 가진 것 없고,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 없어도 주님은 우리와 같이 부족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잘나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을 보시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바로 은혜 입니다. 세상은 자격을 갖추라고, 더 가지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면 충분하다고 가르쳐줍니다.
이 은혜를 가진 사람만이 마음에 참 평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해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영혼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 마음에 참 평강을 가질 수 없습니다. 평강은 은혜의 결과 입니다. 내가 가진 소유나 물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은혜와 평강의 근원이 되십니다.
돈이 많은 부자라고 해서 꼭 마음이 편안한 것은 아닙니다. 높은 권력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꼭 마음에 평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해도, 낮은 자리에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 되심을 믿고, 나의 삶도 주님의 완벽하고 오류 없는 계획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우리 마음에는 하늘의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소유, 건강, 생명, 재능 다 주님께 자원하여 드렸습니다. 자신의 삶 전체가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살았습니다. 비록 그는 사도였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되어 형제와 자매들을 섬기고 또 섬겼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형제 자매는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성도 입니다. 비록 지금은 내가 볼 때 미숙한 신앙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문제가 많은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는 보석처럼 귀하고 귀한 성도 입니다. 내 관점으로 사람을 대하지 마시고, 하나님 관점으로 영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형제 자매들을 섬기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는 거룩한 성도로 살아갈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와 평강을 부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