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18 고난 가운데서도 붙들고 계신 하나님 (욥기 3장 20-26절)

작가 겸 방송인 중에 “최윤희”란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의 별명이 ‘행복전도사’ 입니다. 그녀는 “딸들아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나라”라는 제목의 책을 비롯하여 희망과 행복을 주제로 20 여권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녀는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가 됩니다. 이런 유명한 말도 남기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2008년에 희귀병인 “루푸스”를 앓게 됩니다. 질병이 주는 고통 속에서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2년 동안 병과의 싸움 가운데 온 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너무도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희망을 노래하던 그녀는 2010년 7월 자살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유서에는 이러한 글이 남겨 있었습니다. “저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2년 전부터 여기저기 몸에서 경계경보가 울렸습니다. 너무 많은 일을 하다 보니 밧데리가 방전된 거래요.. 저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견딜 수가 없네요… 그러나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요…”
욥은 자신이 어머니 뱃속에서 죽지 않고 태어난 것에 대하여 깊은 탄식과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죽음 후에 얻게 될 평안함과 안식에 대한 동경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0절에 ‘곤고한 자’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노동자가 새로운 공장에 취직하여 하루 종일 혹독하게 일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온몸이 천근만근 입니다. 어깨가 무겁고, 손에는 굳은살과 물집 투성이입니다. 집에 와서 밥 차려 먹을 힘도, 씻을 힘도 없는데 문제는 이러한 삶을 쉼 없이 계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20절에 나오는 ‘곤고한 자’라는 표현입니다. “곤고한 자”라는 표현은 ‘고통당하는 자’라는 뜻으로 ‘노예’나 ‘종’을 가리킵니다. 고대 사회의 종은 자기가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일하다가 죽는 존재가 노예였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까요? 욥은 자신을 ‘곤고한 자’라고 표현하며 자신에게 육체적 정신적 쉼이 없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해서 강렬한 번뇌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더 낫지 않은가?”하는 심적 갈등입니다.
그는 현재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삶이 하루 하루 이어지는 것에 대해서 깊은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직면한 욥은, 차라리 지금이라도 죽어서 먼저 간 자녀들 곁으로 가고 싶은 참담한 심정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죽었으면 좋겠다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죠. 20절의 다시 보시겠습니까? 첫 단어가 “어찌하여” 영어로 “Why?” 입니다. 지금 욥이 하나님께 따지듯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 이렇게 비참하게 살게 하려면 왜 생명을 주셨어요? 왜 나로 하여금 빛을 보게 하셨어요?”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목숨은 연장시켜주고 계신 하나님께 대한 의문입니다.
욥기 1장을 살펴보면 욥은 모든 것을 다 잃은 그 날,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난 지금 그는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며 도대체 자신의 삶에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지, 왜 다른 것은 다 가지고 가시면서 자신의 목숨은 또 안 거두어 가시는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욥의 모습 속에서 그가 얼마나 큰 내적 갈등과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었는지 보게 됩니다.
욥은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죽음을 간절하게 염원 했는지… 21절에 보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 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보물 찾기 해보셨습니까? 주일학교 아이들과 보물찾기 하면, 선생님이 몰래 숨겨둔 조그마한 쪽지를 찾아다니느라고 얼마나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는지 모릅니다. 고대 사회는 은행이나 귀중품 보관소가 따로 없다 보니, 보물을 땅에 묻곤 했습니다. 그래서 귀족이나 왕족이 죽으면 그들의 무덤을 파는 도굴꾼들이 성행했습니다. 22절에 보면 그들이 무덤을 찾아 보물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땅을 얼마나 열심히 팠을까요? 욥은 보물에 혈안이 된 자들이 이리저리 땅을 파헤치며 보물을 찾는 그 열심보다 자기가 더 간절하게 죽기를 바랐다고 고백합니다. 욥 정말 힘들었던 것 같아요.
본문 속 욥은 극단적인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너무 고통스럽고 또한 수치스럽고 부끄럽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절망만 가득했으며, 인생은 칠흑 같은 암흑 뿐이었으며 비관적인 태도만이 마음을 채웠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매일 마음의 문을 노크해 옵니다. 너무 힘든 날은 죽음의 그림자가 마음의 안방까지 들어옵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고 심지어 스스로를 저주받은 삶이라 여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욥 3:23)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너무 힘들지만 욥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한 가지 사실은 부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리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평상시에 이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고난에 빠진 욥은 지금 하나님의 보호하심마저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너무 힘드니까 모든 것이 다 저주 같고 가치 없이 보이는 것이죠. 2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욥 3:24)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식사할 때 밥을 먹고 국을 먹지 않습니까? 그런데 욥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밥이 아니라 탄식이 입 안으로 들어옵니다. 또한 그가 겪고 있는 악창이 얼마나 심한지 그의 앓는 소리, 그의 울부짖음이 마치 물이 바닥에 쏟아지듯이 처참하게 쏟아지고 있음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욥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질병과 고통 그리고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 앞에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욥은 26절에 자신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욥 3:26)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우리 삶이 욥과 같이 평안도 없고 쉼도 없고 조용함도 없고 그저 고난만 와 있다면 얼마나 사는 것이 힘들겠습니까?
혹시 과거에 욥과 같은 고통을 경험해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욥 정도는 아니지만, 혹시 지금 욥처럼 삶에 평안도 없고, 쉼도 없는 생활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욥 정도의 고난은 아니어도 사는 것이 힘들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괴롭고,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이 고통스런 삶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욥이 고난 가운데 은연 중에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 뿐만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붙잡고 계셨습니다. 영어로 힘든 날, 고통스러운 날은 “Rainy Day”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Sunny Day”만 좋아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 세상에 “Sunny Day”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온 세상이 사막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Sunny Day”만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Rainy Day”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19:71 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고난 당하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며 유익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 그 어느 곳 보다 광야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장 많이 체험한 것처럼 인생의 고통과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겸손케 하며 우리 삶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주는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힘들 수 있습니다. 평안도 쉼도 없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시고 지금도 우리 삶을 인도해가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 고난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평안과 쉼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앙을 주시려 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을 주려 하십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의 경험과 지혜를 뛰어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