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2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레위기 19장 17절)

지난 6월 러시아에서 열린 월드컵 경기 가운데 축구 종가 잉글랜드와 남미의 강호 콜롬비아를 상대로 16강전 경기가 열렸습니다. 경기는 무승부로 끝이 났고, 월드컵 8강에 올라갈 나라를 결정짓기 위해 결국 승부차기로 이어졌습니다. 초반 승부자기에서 3대2로 승기를 잡은 콜롬비아는 아쉽게도 축구 선수 ‘우리베’와 ‘바카’의 실책으로 결국 잉글랜드에게 3대 4로 패배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문제는 경기가 끝나고 일어났습니다. 승부차기를 실책한 콜럼비아 축구선수 ‘우리베’와 ‘바카’의 SNS 게시판에 “네가 죽기를 바란다.” “범죄조직에서 처리할 것이다.”라는 위협적인 살해 협박의 글들이 가득 넘쳐 났습니다. 콜럼비아 국민들이 이 사건을 웃어 넘길 수 없는 것이 실제로 지난 1994년도 미국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기록한 “안드레스 에스코바르”라는 이름의 콜롭비아 선수가 귀국 후 총에 맞아 사망했던 비극적인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경기라는 것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패널트킥 한 번 실축 했다고 살해 위협까지 받는 콜롬비아 축구선수들은 참으로 측은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만일 패널트킥을 실책 한 축구선수가 자기 형이나 동생, 혹은 자기 아버지나 아들이였다면 그렇게까지 강하게 책망하고, 살해 협박까지 했을까요? 저는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집에 돌아온 선수의 등을 토닥여 주며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다음에 잘 하면 되지.” 하고 격려와 위로를 해주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가혹할 정도로 타인의 실수에 냉정합니다. 앞서 언급한 콜롬비아 축구 선수들은 경기 전에는 국민의 영웅처럼 여겨지던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실수를 용납해주지 못하고 이처럼 비난과 살해 협박까지 주어진 것이죠.
요즘 한국에는 ‘내로남불’이란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내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의 줄임말입니다. 바람난 사람이 자기가 피는 바람은 로멘스라고 생각하고, 남이 바람 피면 불륜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의 죄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고,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여지 없이 죄인으로 낙인 찍어 버리고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타인이 지은 죄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 해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죄의 종류에 따라, 상대방의 성숙함에 따라, 신앙의 수준에 따라, 성별, 나이, 문화, 타자의 상황에 따라 다루는 방법이 달라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은 이에 대하여 가져야할 공통적인 자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 레위기 19장 1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레 19: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먼저 오늘 본문을 두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관용과 책망입니다. 먼저 관용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 부분이 바로 관용입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집니다. 세상에 넘어지지 않고 걸음걸이를 배운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라도 실수하는 법입니다. 사람 치고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고, 죄 없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관용’은 단순히 “나도 죄인이고 저 사람도 죄인이다. 그러니 용서하자”는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상대방의 범죄나, 실수나, 악한 일로 인하여서 그를 마음 속으로 증오하는 것은 곧 살인하는 죄를 짓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상대방을 미워하거나 증오심을 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집에 찾아오면, 마실 물 내주고, 과일 깎아주고, 그를 선대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과실을 용서해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정신 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관용’의 정신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평생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았기 때문에, 백 데나리온 빚을 진 형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은 무조건 ‘관용’의 자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미워하지 않아도 죄에 대해서는 단호 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죄는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하반절을 보니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책선’이란 말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책망의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단순히 남의 실수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은 상대방을 헐뜯고 모함하여 손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망’은 상대방의 실수를 교정하여 결과적으로는 선을 도모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책망’하십니다. 우리의 범죄와 잘못을 교정하여 선으로 향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결코 불의한 것과 타협하거나 죄를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책망으로 이웃과 형제가 선한 길로 나올 수 있도록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을 권면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17절 말씀에는 ‘관용’과 ‘책망’의 정신이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없을 것 같고 서로 정반대의 사상 같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바로 이 두가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되 자기 몸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를 미워 하셔서 십자가에서 죄의 머리까지 부서 버리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관용과 책망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죄인에 대해서는 관용의 정신을 즉, 저들이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을 지난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에 대해서는 용납함 없이 미워해야 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관용과 책망의 정신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