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제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 입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사람은 소나 양 혹은 염소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5절에 나오는 한가지 표현을 눈 여겨 보고 싶습니다. 바로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희생을 잡을 것이요.”라는 말입니다. 즉 속죄제로 드려질 제물이 될 동물을 죽이는데 어디에서 죽입니까? ‘여호와 앞’에서 죽입니다. 제물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제물을 여호와 앞에서 죽인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죽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제 우리가 소제를 배우면서, 소제는 곡식을 고은 가루로 완전히 빻아서 드리는 것을 배웠으며, 이는 주님을 향한 완전한 헌신 그리고 내면의 탐심과 정욕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속죄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속죄제를 드릴 때 제물을 하나님 앞에서 잡아 죽이는 것은, 곧 죄를 좇아가던 부패한 자신의 옛 사람을 죽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얻고 새 사람 되는 원하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 되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죄제를 드리며 제물로 바쳐진 동물이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자신의 죄를 죽이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죄를 완전히 죽이지 못한 채 계속해서 세상의 것들을 주장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죄를 회개하기 보다는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계속해서 죄를 즐기며 살아갑니다. 죄를 지은 것을 후회하기 보다는 죄가 주는 달콤한 유혹에 죄를 사모하는 정욕을 품은 채 신앙생활 합니다.
그러나 제물이 죽지 아니하면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듯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죄의 문제가 남아 있으면 신앙생활에 아무런 능력도 은혜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해도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했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그 속에 탐심과 정욕을 죽이지 못한 채 하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죄를 사모하는 마음을 죽이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희생을 잡으라”는 말씀의 의미 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 나아온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철저하게 죽여야 합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레 6:27) 무릇 그 고기에 접촉하는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 제사를 드리기 위해 희생 제물을 죽이다가 그 동물의 피가 옷에 묻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사를 위해 바쳐진 제물의 피는 거룩하므로 그 피가 묻은 옷을 함부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속죄의 피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피가 옷에 묻었을 때는 거룩한 곳에서 빨아야만 했습니다. 즉 우리는 속죄제에서 피를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 준 예수의 피의 공로로 살아가는 우리가 또 다시 세상에 나가서 또 다시 죄를 짓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값진 피로 깨끗해진 우리들을 죄로 더럽히는 것은 예수의 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값 비싼 명품 가방을 산 사람들은 비 오는 날은 잘 안 맵니다. 왜냐하면 가방 가죽에 빗물이 맞으면 가방이 변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주고 산 가방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게 세상의 이치인데, 하물며 돈으로 주고 살 수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값진 보혈로 산 바 된 우리들의 영혼을 세상의 더러운 빗물에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은 인정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값싸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죄제를 위해 바쳐진 제물로부터 나온 피가 옷에 묻어도 그 피를 거룩하게 다루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에 뿌려진 예수의 피를 소중하게 여기며 거룩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2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레 6:28) 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릴 것이요 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닦고 물에 씻을 것이며” 속죄제에 바쳐진 제물의 고기를 흙으로 만든 그릇에 넣고 삶았으면 그 토기를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나 그 제물의 고기를 유기 즉 놋으로 만든 그릇에 넣고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지 않고 물로 씻어서 재활용이 가능합니다. 왜 그럴까요? 토기는 흙으로 만든 그릇으로서 고기 기름이 묻거나 냄새가 배면 완전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이 시대 무슨 ‘퐁퐁’이 있었겠어요? ‘세제’가 있었겠습니까? 그릇을 닦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기가 담겨진 토기는 이 시대에는 아무리 씻어도 그 냄새와 기름이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대로 놋으로 만든 유기 그릇은 기름이나 냄새를 흡수하지 않기 때문에 깨끗하게 씻기만 하면 재활용이 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왜 제물로 사용된 고기의 기름과 냄새가 밴 토기 그릇은 깨뜨려 버리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용기를 청결하게 사용하려는 차원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릇 안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예물의 모든 부분, 기름과 냄새와 같은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부분을 철저하게 닦아 냄으로써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제물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하나님은 거룩한 제물이 사상적인 것과 혼합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거룩함으로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세속적인 목적으로 오용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제물의 기름과 냄새까지도 거룩하게 성별 하셨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제사 때 바쳐지는 제물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제물의 기름과 냄새와 같이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 하나님을 위해 성별 되었듯이, 우리 삶의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거룩하게 유지하여 살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의 제사를 보며, 단순히 소나 양과 염소를 잡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로 죄를 사함 받는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씀에 대한 오해해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속죄제를 드리는 사람은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세상과 완전히 구별하여 자신의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도 하나님께 드리기로 헌신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이와 같은 자세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속죄제를 위한 제물을 하나님 앞에서 잡아 죽였던 것처럼, 죄로 물든 우리 자신의 옛 사람을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죽여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려 주신 보배로운 피를 귀하게 여겨 다시 죄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삶의 작은 부분까지도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속죄제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과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열심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