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28 혀를 길들이는 삶 (야고보서 3 1-6)

달리는 말을 컨트롤 하기 위해서는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명마라 하더라도 기수가 고삐를 놓치게 되면, 말은 기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달리고 싶은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기수가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을 타고 있는 기수는 무엇보다도 고삐를 잘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말의 고삐와 같이 단단히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언어생활 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고삐를 전혀 붙잡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에 따라 감정을 표출하며 상대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입 안의 말을 내뱉습니다. 결국 그들의 거친 언어로 인해 상대방이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하고, 낙심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언어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의 변명을 잠깐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본래 말투가 이렇다.” “나는 본래 기질이 다혈질인데 어떻하느냐?” 그러나 그러한 대답은 자신의 죄를 용납하는 핑계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우리보고 “거친 기질을 가진 사람은 거칠게 살아도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얼마나 성격이 거칠고 입이 험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툭하면 ‘욱’하고 화를 내는 다혈질 기질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 가시던 날 칼로 상대편의 귀를 자른 사람이 바로 베드로 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달라졌습니다. 그의 거친 언어생활은 부드럽고 온유한 어투로 변화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말로 여러 사람 상처 주고 아프게 했지만, 이제는 그의 말을 통해 격려와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베드로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성격과 기질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언어생활에 반드시 주의하고 성숙해질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말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줍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그 사람과 서너 시간 앉아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의 성품, 신앙의 성숙도 이런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언어생활은 하룻밤 사이에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꾸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약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이 구절이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쉽게 말하면 자신의 언어생활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의 다른 모든 행동도 스스로 복종시킬 수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절제된 언어생활을 하는 것은 성숙한 사람의 지표이며, 동시에 언어생활에 있어서 성숙함을 이룬 사람은 다른 신앙생활도 넉넉히 잘 할 것을 말해줍니다. 자신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절제된 언어생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언어생활을 해야 합니다. 야고보가 볼 때 아무 생각 없이 입에서 툭 튀어나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절제할 줄 모르는 여전히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약 3: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여기서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한다’는 표현이 바로 말에게 재갈을 먹여 고삐를 당기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의 기수는 재갈을 조정하여 말의 모든 행동을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체에서 가장 작은 부위 중 하나인 혀를 제어하게 되었을 때 몸 전체를 다스릴 수 있을 만큼 혀가 가진 영향이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혀와 같이 작은 것이 큰 것을 제어하고 다스리는 예로 야고보는 ‘배를 움직이는 키’와 ‘산을 불태우는 작은 불씨’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약 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 시대는 기술과 과학의 발달로 인해 웬만한 빌딩 크기보다도 더 큰 배를 만듭니다. 그러나 수백 톤 혹은 수천 톤을 운반할 수 있는 거대한 배라 할지라도 그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키는 여전히 한 사람의 성인 남자가 두 손으로 돌릴 수 있을만한 충분한 크기 입니다. 그 작은 키가 자신보다 몇 100배는 더 큰 배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배가 자신의 항로를 따라 올바르게 항해하는 것은 ‘키’를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바다 위에 광풍이 물고, 위험한 암초가 도사리고 있어 배가 파선될 위기가 바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지만, 선장이 키를 잘 조절하면 그러한 위험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혀를 제어하지 못해 허탄한 말이나 막말을 하고, 또한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는 언어생활을 한다면, 그의 삶은 파괴되고 좌초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말하는 바를 잘 제어한다면 우리 자신의 인격을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는 많은 나무를 태우는 작은 불씨 입니다. 새끼 손가락 한 마디만한 불씨만 있어도 태백산맥 전체를 태울만한 큰 화마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가을철에 산에서 버려진 담대꽁초 하나 때문에 산 전체가 검게 타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뉴스에서 여러 번 보았습니다. 켈리포니아 주 같은 경우에는 작은 불씨로 시작된 산불 때문에 사람들이 집을 잃어버리고 전 재산을 불에 태워버리는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사람의 혀가 바로 불씨와 같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혀를 잘 못 사용하게 되면 그 혀가 불과 같이 작용하여 큰 파괴력을 사람들의 삶 속에 끼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어린 시절 누군가가 툭 하고 뱉은 거친 말들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고 “어떻게 너 같은 애가 우리 집에 시집 왔니?” 하는 말들… 부모가 자녀를향해 “넌 내 자식 아니다. 너가 죽든 말든 상관없어.” 라고 말한 다던가… 자녀가 부모에게 “엄마가 나한태 해준게 뭐가 있는데? 아빠가 도대체 나한태 해 준게 뭐가 있는데!” 하는 이런 말들은 큰 상처를 줍니다. 감정이 격해져서 나온 말들입니다만 때로는 내가 무심코 던진 말에 상대편이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 옛 속담에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혹은 장난 삼아 던진 돌이지만 개구리의 입장에서는 생명이 오가는 커다란 위험인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무심코 내뱉은 말에 형제 자매가 맞아 죽게 됩니다.’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 상대방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상처와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혀를 불의의 세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인격을 파괴시킬 수 있을만큼 위험스러운 파괴력을 지니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점차 몸이 회복되고 아픔이 수그러지면서 자연스럽게 치유 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로 인한 상처는 평생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못된 말 한마디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일도 발생합니다. 그 만큼 혀는 무시무시한 영향력과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의 언어생활 문제에 대하여 지적했습니다. 그는 말실수 하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는 문제임을 강조했습니다. 혀는 그 크기가 작지만, 그 파괴력은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혀를 길들이는 것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혀를 제어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혀를 제어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최근에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악한 말은 무엇입니까? 혹시 나의 길들여지지 않은 언어 생활로 인해 상처 받거나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오늘 이 하루 말하는 것에 더욱 주의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상처 주고 아프게 하는 말 보다는,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의 메시지를 격려와 소망의 말을 전해줄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