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행이나 구제 혹은 봉사 같은 자력으로 구원 받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이 말이 그리스도인에게 행함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행위야말로 우리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보여주는 시금석 입니다.
나이아가라를 배경으로 전해지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곡예사가 나이아가라를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줄을 연결해 두었습니다. 그는 장대 하나만 들고 그 줄을 건너려 합니다.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습니다. 곡예사는 사람들을 보고 묻습니다. “제가 이 줄을 건넌 것이라고 믿습니까?” 사람들은 “Yes”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곡예사가 다시 물어봤습니다. “제가 여러분 중 누군가를 목마 태우고 건널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또 “Yes”하고 대답했습니다. 곡예사는 다시 물었습니다. “자, 그럼 저와 함께 이 줄을 건너실 분은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환호하며 “당신이 나이아가랴를 건널 줄로 믿습니다”하고 외치던 사람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백 번 천 번 입술로 고백해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은 가짜 믿음이며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보는 오늘 이런 죽은 믿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허구요, 죽은 믿음으로 구원하는 데 유효하지 않은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보여준 두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고 다른 한 사람은 기생 라합 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는 해에 그에게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몇 해 후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이 어떤 자식인데 제물로 바치겠습니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을 어떻게 아브라함이 제 손으로 칼로 찔러 죽이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 도저히 머리로 이해되지 않았지만, 분명한 뜻이 있으리라 믿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또한 만일 자신이 이삭을 죽여도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순종의 행위를 통해 그가 가진 믿음이 참 믿음이라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사는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손에 가나안 사람들을 붙이셨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온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그들이 무사히 도망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당국에 발견되면 그녀는 당장 사형 당했을 만큼 커다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믿고 이스라엘 편에 가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라합 역시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했습니다.
어찌 보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이라고 주장하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대치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사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며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써 영혼의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은 행함으로 참인지 거짓인지 구별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21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마 7: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은 행함과 일치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입술로만 “믿습니다. 믿습니다.”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실 때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함과 일치된 믿음을 “실천적인 믿음”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천적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삶의 현장에서 믿음이 나타날 수 있도록 행해야 합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15-16절에 나오는 주변의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지나친다면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역행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또한 그가 거짓된 믿음을 소유한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26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 2:26) 마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혼을 말하는 단어 ‘프뉴마’는 호흡이란 단어로 대치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영혼이란 단어 대신에 호흡이란 단어를 넣어 다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호흡하지 않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우리 몸이 어떻게 호흡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하루도 호흡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호흡이 멈춰지는 순간 우리 몸은 죽은 몸이 됩니다. 야고보는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흡이 멈춰진 몸은 죽은 몸이듯이,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행함이 빠지면 그것은 죽어버린 믿음이 됩니다. 호흡하지 않는 몸은 생명력이 없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 역시 구원의 능력이 없는 믿음이 되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믿는다” 말하고 있지만, 정말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 우리의 행함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라합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으로 그들의 믿음이 참 믿음임을 나타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차례입니다. 최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가운데 아직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고 감내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자 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 합시다. 우리의 남은 삶 가운데 행함이 있는 아름다운 순종의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