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26 사랑은 긍휼이다 (야고보서 2 8-13)

어느 날 율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그에게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돼 있느냐?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러자 율법사가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면 네가 살 것이다.”

율법에는 많은 내용들이 있지만 율법사는 그것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정리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모든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야 말로 최고의 법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 사도 바울은 “모든 율법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한 마디 말씀 안에서 완성된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야고보서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약 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당시에 로마 제국 최고의 법은 황제가 직접 의회에 나가 지정한 법을 말합니다. 황제에 의하여 제정된 법은 그 누구도 변경할 수 없었으며 로마 제국 전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로마 황제보다도 더 뛰어나신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법은 하나님 나라 시민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최고의 법입니다. 그리고 그 법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 십일조 생활, 봉사 등등 겉으로 드러나는 헌신의 종류가 많다 하더라도 함께 신앙생활하는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의 모든 수고와 헌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실 때는 여전히 악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경종이 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사랑 없는 봉사와 헌신은 하나님 보실 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다른 법을 다 지켜도 한 가지 법을 지키지 못하면 결국 범법자가 되고 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율법의 다른 모든 법들을 다 지켜도 율법의 최고의 법인 ‘이웃 사랑’이 빠지면 결국 다른 법을 못 지키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 내용이 10-11절에 나와 있습니다. “(약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약 2: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지금 야고보는 십계명 중 6계명과 7계명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둘 중 하나만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전부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권위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 중 하나라도 어기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유대인들은 율법의 경중을 정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고, 그에 비해 어떤 것들은 무시해도 별 탈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생각이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들이 죄로 잘 인식하지 않습니다. 살인이나 간음죄만 조심하면 되지 미움 죄는 가벼운 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인인 우리들의 생각일 뿐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인자나, 간음자나, 이웃을 미워한 자다 다 똑 같은 죄인 입니다. 결국 죄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 속으로 남을 미워한 자는 이미 살인을 한 사람이고, 마음 속으로 음욕을 품은 사람은 이미 간음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실 때 미움과 살인 둘다 똑 같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야고보가 ‘살인’, 간음’ 이러한 죄들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 안에 사람을 차별하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누구는 잘 대해주고 사랑해주는데 반해, 어떤 사람들은 무시하고 등한시하고 천대했습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 살인과 간음 같은 죄들을 저지르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형제애 대해 긍휼을 베풀지 않고 무자비하게 대했다면 그는 결국 하나님 보실 때 살인자나 간음한 자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함께 한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하는 형제들을 향해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도리어 무시한 자들을 향해 강한 어조로 13절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은 무엇입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본래 죄로 인해 죽어가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고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형제들을 또한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형제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고 그들을 무시하고 천대하고, 어떤 이들은 아예 차별대우까지 하기한다면, 그것은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형제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는 자는 긍휼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왕으로부터 평생 일해도 갚지 못할 만큼 큰 돈인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갚을 수 없는 빚 때문에 평생 감옥에 갇혀 있을 수 밖에 없는 비참한 형편이었으나, 다행히도 왕에게 큰 긍휼을 입었습니다. 왕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는 왕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고 왕궁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그는 우연히 길을 걷다가 자신에게 100데나리온 약 3개월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을 빚진 자기 친구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 멱살을 붙잡고 돈을 갚으라고 협박했습니다. 그의 동료가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조금만 참아 주게. 내가 다 갚겠네.’그러나 그는 참지 못하고 가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 일을 본 다른 동료 종들은 너무 기가 막혀서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습니다. 그러자 왕이 빚을 탕감 해준 그 종을 다시 불러서 말했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나에게 애원하기에 내가 네 빚을 모두 없애 주었다. 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하지 않았느냐?’ 임금은 잔뜩 화가 나서 그 종을 감옥 관리들에게 넘겨주며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 35절에 이렇게 마무리하셨습니다. “(마 18:35) 만일 너희가 진심으로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행하실 것이다.” 야고보의 말처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은 이웃을 차별하며 긍휼을 행하지 않는 죄를 심각한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방법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까?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 긍휼 없는 심판을 경고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만약 우리가 도와야 할 때 돕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오늘 어떻게 긍휼을 베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긍휼의 마음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로 죄를 용서 받았으니, 우리에게 죄 지은 자도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