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23 차별하지 않는 믿음 (야고보서 2 1-7)

미국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똑 같은 인형 두 개를 만들었습니다. 두 인형이 다른 점은 하나는 백인 인형이고 다른 하나는 흑인 인형입니다. 인형의 피부 색깔만 빼고 나머지는 다 동일 합니다. 아이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두 인형 중 누가 더 예쁜가?” 이 질문에 대다수의 아이들이 백인 인형을 골랐습니다. 두 번째 질문을 물어 보았습니다. “둘 중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 그러자 대다수의 아이들은 흑인 인형을 뽑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인형의 피부 색깔을 보고 “이 인형의 성격은 어떠한 것이다” 하고 판단한 것이죠. 이러한 시험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외모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것은 외모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직업, 사회적 지위를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상대방이 가진 외적인 모습들 때문에 차별 대우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금 뺏지를 가슴에 달고 있는 국회의원이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마침 같은 주에 헝클어진 머리와 남루한 옷을 입은, 누가 보아도 가난해 보이는 분이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교회에서 자리를 안내해주는데 국회의원 성도는 예배 집중해서 드리기 가장 좋은 상석으로 인도합니다. 그에 비해 다른 한 사람은 눈에 안 띄는 가장자리에 자리를 주었습니다. 친교 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는데 국회의원 성도가 밥 먹을 때는 모자란 것 없나 계속 살피며 물도 갖다 주고 커피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다른 한 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굶고 가든지 별로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 바로 차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겉으로 보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외적인 기준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비록 세상에서 지위가 낮고, 비천한 인생을 살고 있고, 가난하고, 병들고, 냄새 나고, 얼굴이 못 생겨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외적인 기준들을 뛰어넘어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도 사람들을 대할 때 그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외적인 기준과 상관없이 또한 차별없이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야고보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야고보는 지금 이 일이 회당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회당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 입니다. 두 사람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회당 즉 교회에 왔습니다. 한 사람은 손에 금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값 비싼 고급 브랜드 명품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다른 사람은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흔히 이 본문을 읽으며 손에 금가락지를 낀 사람을 귀부인이나 여자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원문을 보면 이 사람은 남성 입니다. 오늘날이야 반지가 흔하니까 손에 금반지 은반지 끼는 사람을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에서 손에 가락지를 끼는 것은 부유한 계층 사람들 특히 높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해당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여기서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높은 계급이거나 돈이 엄청나게 많은 부유한 부자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가난한 사람이 입은 더러운 옷이란, 누더기 옷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걸레 같은 옷 입니다. 너무나도 보잘 것 없고 초라한 모습으로 회당에 온 것입니다.

자, 그런데 회당에 온 이 사람을 어떻게 차별하여 대하고 있습니까? 높은 계급, 부유층은 환하게 웃으며 환영하며 좋은 자리, 상석에 앉게 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무시하여서 어디 안든지 말든지 상관도 안하고, 그냥 구석에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교회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대우 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 안에서 부요한 자로 세워 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가운데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자기 자신도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 것만, 또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대우 한다면 어찌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누가 힘이 있느냐를 따지며 차별합니다. 돈, 권력, 지식, 가문과 힘이 되는 것을 누가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을 구분 짓고 차별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자가 와서 특별대우를 받고, 가난한 자가 좋지 못한 차별대우를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교회가 성도들의 외적 조건을 가지고 차별하는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질타 했습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친형이신 예수님께서 평범한 목수 30년을 사신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은 늘 겸손한 모습으로 가난한 자들, 연약한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고보는 이 당시 유대인의 회당 내에서 일어나는 차별의 현장을 그대로 묘사하며 그리스도인 가운데 존재하는 차별대우를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고아이든지, 과부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예수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이러한 자들을 차별한다면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반대하는 행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함께 신앙생활 하는 또 다른 성도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사회적 강자이든지 사회적 약자이든지, 경제적 약자이든지 부자이든지 차별 없이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연약할 때 강하게 하시고, 우리가 가난한 할 때 우리를 부요케 하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어떠한 성도라도 차별없이 끝까지 사랑하며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