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21 시험을 이겨내라 (야고보서 1 12-16)

오늘 본문을 읽을 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용 된 ‘시험’이란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본문의 의미가 완전하게 달라집니다. 야고보서 1장을 두 파트로 나누어서 1-12절까지 사용된 시험과 13절부터 이후로 사용되는 ‘시험’이란 단어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먼저 1-12절까지 사용된 시험이란 단어는 외부적인 상황에서 오는 ‘시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13절부터 나오는 ‘시험’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유혹’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모든 단어를 ‘시험’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사실 원어를 살펴보면 ‘시련’과 ‘유혹’이라는 분명한 의미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 이런 관점을 가지고 12절에 있는 ‘시험’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내부에서 일어나는 유혹이 아니라, 외부적인 상황에서 오는 ‘시련’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진실되이 믿는다는 것은 많은 핍박을 가지고 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슴 아픈 시련들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주어집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시련을 끝까지 인내하며 참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2절에서 사용된 ‘인정하다’란 말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금으로 인정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곧 성도가 자신이 당한 핍박을 끝까지 인내하며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그의 신앙이 순결한 금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 받는다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상급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본래 면류관이란 고된 훈련으로 인한 땀과 고통을 다 견뎌내고 끝내 고대 올림픽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왕관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면류관은 시험과 박해 속에서도 세상에 무릎 꿇지 않은 자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까지 사용되는 ‘시험’이란 단어는 ‘시련’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 같은 ‘시험’이란 단어입니다만, 13절부터 사용되는 ‘시험’이란 단어는 외부적인 상황에서 오는 ‘시련’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유혹’을 의미합니다.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에덴 동산에 살던 하와에게 찾아온 뱀은 그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유혹을 합니다. 유혹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아무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누구를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악에서부터 거리가 머십니다. 따라서 죄를 짓도록 동조하는 유혹을 하나님이 하실리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악으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친히’ 아무도 악을 짓도록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이 유혹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14절을 보니 오직 각 사람이 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꾐에 넘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도구일 수 있지만, 유혹은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유혹 당할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절대로 합리화 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도둑이 거액의 돈을 훔치려고 하다가 경찰에게 잡혔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가 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내가 도둑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그 큰 돈으로 나를 유혹하셨기 때문이야. 하나님이 나를 그런 상황에 놓지만 않으셨어도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을꺼야. 내가 죄은 것은 전적으로 돈으로 나를 유혹한 하나님 탓이야” 이런 식으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을 탓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가는 것일 뿐입니다. 14절에 ‘미혹됨’이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본래 이는 ‘미끼로 고기를 꿰어 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미혹됨이란 고기가 미끼를 물어 낚시 바늘에 찔려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욕심이 가득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결국 미끼 때문에 낚시 바늘에 걸린 생선처럼 이리저리 끌려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야고보는 본문 말씀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에 찾아오는 ‘욕심’을 강하게 경계 합니다.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인간의 모든 죄는 욕심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인간이 욕심을 가질 때 우리 마음 속에 죄가 싹이 트고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욕심이 결국 인간의 영혼을 사망에 이르게까지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욕심을 인간 본연의 성질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욕심이야 말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 이르게 한 가장 치명적인 죄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대한 욕심과 탐심의 마음을 강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런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욕심은 우리의 영혼을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악에게 시험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시험하지도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악의를 품고 그들이 사망으로 향하도록 사람을 유혹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외부에서 오는 시련을 참아내도록 도우시고, 참고 인내한 성도들을 위해 생명의 면류관을 예비하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 ‘시련’이 찾아오면 그 안게 숨겨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유혹’이 찾아오면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물리쳐야 할 내면의 죄악된 본성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강하게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시련’의 시험은 끝까지 승리하여 인내하고, ‘유혹’의 시험은 주의 뜻이 아니기에 이겨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