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후 또 다른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예수님에게도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몇 명의 자매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성경에는 예수님의 형제가 4명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입니다. 이 중 예수님의 형제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한 바로 그 유다이며,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기록한 야고보 입니다. 본래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 생전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 이들은 자신의 형인 예수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이후 예수님의 형제 중 야고보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와 함께 초대 교회의 리더가 되어 주님을 섬겼습니다.
야고보는 자신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그에게는 자신이 예수님의 동생이란 어떤 특권의식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소유된 종임을 밝혔습니다. 그는 이 편지를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보낸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편지 같은 경우 그는 어느 특정한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고린도 교회, 에베소 교회,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들은 누굴까요? 사도행전에서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바로 예루살렘 밖으로 흩어진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시작으로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엄청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여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도록 유대 사회에서 먹고 살 수 없도록 왕따를 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큰 시련과 핍박을 견뎌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리더 야고보는 유대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한 편지를 보내며 본문 2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우리가 일부러 시험을 찾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모든 시험을 다 피하겠습니까? 본문에서 ‘시험을 만나거든’이란 말은 어려운 여건과 상황 한 가운데 떨어진 모습을 의미합니다. 깊은 웅덩이에 빠지고,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것입니다.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만일 시험이 찾아온다면, 낙심하지 말 것을 권면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시험을 통해 믿음의 연단을 받아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성장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병원에서 주사를 맞으면 아프고 약을 먹으면 입에 쓰지만 그러한 고통을 견뎌내면 더욱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듯이, 인생의 시련은 쓰디 쓴 고통과 아픈 상처를 줄 수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야고보는 3절에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준다고 했습니다. 시험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시험을 당하고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가 말하는 ‘시험’이란, 마치 금 안에 끼어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되는 풀무 불과 같습니다. 금 입장에서 보면 불 안에 들어가는 자신을 녹일만큼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가면 찌꺼기 같은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잘 정제되어 더 높은 순도를 가진 금으로 나오게 됩니다. ‘인내’란 바로 영혼이 풀물불에 들어간 금처럼 시련 과정을 통해 더욱 더 순결한 믿음을 탄생시키는 과정입니다. 금이 중간에 정제 되지 않고 나오면 그 안에 있는 불순물들이 제거되지 않아 순도 높은 금이 될 수 없습니다. 시련을 끝까지 견뎌내는 사람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더 거룩하고 신실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시련을 받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라고 권면 했습니다. 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이 말에는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4절 후반절을 보면 인내를 온전히 이룬 그리스도인은 온전하고 구비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이란 제사 때 쓰이는 제물에 아무런 흠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우리가 시련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할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절에 ‘구비하여’라는 말은 성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시험 자체가 기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험과 고통의 시간을 통해 성도들의 믿음이 온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시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서 성도가 온전하게 이르게 되는 것 입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시험과 시련이 분명히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고, 그만두고 싶은 어려운 시간들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인내를 끝까지 이루어 내면, 그의 신앙과 인격은 시험과 시련을 통해 더욱 더 단련되고 성숙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시련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권면했습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넘어지게 하려고 시련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내의 터널을 끝까지 통과해 마침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할 때에는 환영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시련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먼 훗날 알고 보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초청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가 시련을 포기하지 않는 인내를 통해 온전함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견디기 어려운 믿음의 시련을 겪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 시련 앞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인내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승리를 주실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시고 마음에 새로운 소망을 품고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내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