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9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절제 (사도행전 15 22-29)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의 자손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오직 할례를 받은 자들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은 수천년을 이어 왔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주장하자, 교회 내의 많은 유대인들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교회 안에서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라는 질문으로 많은 논쟁이 대두되었습니다. 초대 교회를 구성한 많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도 않고, 구원 얻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인 사도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교회는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을 얻는 것에 할례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을 수 있다고 정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은 대단히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기반한 옳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회의의 결과는 매우 큰 파장을 일으킬 가능성을 앉고 있었습니다. 수천년 간 이어온 할례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곧 구약성경 전체의 시스템을 뒤흔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로 말미암아 할례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구약 성경의 다른 명령들은 어떠한가? 어떤 말씀들을 지켜야 하고, 또 어떤 말씀들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하는 새로운 화두가 떠오르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무디 라디오를 들으면 방송국에 “십일조를 내야합니까?”하고 문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것처럼, 십일조도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인데 왜 지켜야 합니까?”하고 묻는 것이죠. 정말 예수님만 믿으면 구약성경에 기록된 교훈들을 하나도 안 지켜도 되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 중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정한 동물, 부정한 동물을 가려서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부정한 시체를 만지면 옷을 빨아야 한다든지, 머리를 밀어야 한하든지 하는 레위기의 정결법을 지키는 사람도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정결제사나 속죄제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다 완성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과연 새롭게 얻은 이 자유로 어떠한 모습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중고등부 아이들 수준으로 들어가면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담배 피면 지옥 갑니까? 술 마시면 지옥 갑니까?” 아닙니다. 주초 문제는 구원 받는 여부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받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성도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받은 자유를 함부로 쓰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 기뻐 하실만한 모습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보낸 편지 글에는 두가지 내용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구원 받기 위해서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주의사항을 전달합니다. 28-2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15: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행 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초대 교회는 당시 이방인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풍습을 주의시켰습니다. 에를 들면, 우상에게 제사드린 음식을 먹는 것, 피를 먹는 것, 그리고 음란한 삶을 멀리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자유를 통해 방종의 삶을 살지 않고, 절제 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율법의 모든 요구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고 해서 그 자유를 가지고 아무렇게나 육신의 소욕 대로 살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힘들게 땀 흘려 일하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용돈을 주며 말했습니다. “이거 네 용돈이니까 너 마음대로 사용 하거라.” 철없는 자식이라면, “아버지가 내 마음대로 쓰라고 주신 돈이니까 한번 내 마음대로 흥청망청 써야지” 하고 돈을 탕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하는 자녀라면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하면 아버지께서 좋아하실까?”하고 고민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중하게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아버지께서 좋아하실 만한 방향으로 돈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얻은 자유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얻은 이 자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값으로 지불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귀한 자유를 우리가 아무렇게 사용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바울은 말했습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하던지 자유가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10장 23절에서 바울이 또 다시 말했듯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또한 형제 자매들을 서로 섬기며 사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방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절제를 통한 참 예배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가지고 방종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자유함을 누리되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말씀이 기준이 되는 절제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이웃들에게 평안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우리가 절제해야 하는 것은 없습니까? 단절해야 하는 것은 없습니까?                   오늘 이 하루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 안에서 살아가되, 절제함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는 귀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