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전통해 해당하는 탈무드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두개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를 몸이 하나니까 한 사람으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머리가 두 개니까 두 사람으로 봐야 할까요? 사람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고민하다가 지혜롭기로 소문난 유대인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몸이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두 사람입니까?” 그러자 잠시 곰곰이 생각해 잠긴 랍비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막대기를 가지고 한쪽 머리를 때려 보거라. 만약 다른 쪽 머리가 통증을 느낀다면 그것은 한 사람이다. 그러나 한쪽이 맞고 있는데도 다른 한쪽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다.” 랍비의 지혜로운 조언을 들은 사람들은 그제서야 한 몸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예수라는 하나의 공통된 머리 아래 있는 지체들입니다. 교회는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 입니다. 서로의 기쁨과 즐거움 뿐만 아니라, 서로의 아픔과 눈물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형제의 고통과 어려움을 보고도 아무런 아픔을 갖지 못한다면 그들은 한 몸이 아닌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초대교회는 온전히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더 많이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쌓고 싶어합니다.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 말할 수 있는 아담 스미스가 말한 자유시장경제를 살펴보면 인간의 이기심을 그 기본 전제 조건으로 깔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더 많이 갖기 위해서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현대 경제학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을 뛰어넘은 초대교회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도 소유권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습니다. ‘통용’이란, 각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자기고 있음에도 그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필요한 제 3자가 언제든지 자유롭게 값없이 쓸 수 있는 권리를 갖도록 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떻게 이들은 이처럼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을 이겨내고 자신의 것을 남을 위해 나눠주고 섬기며 지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었고, 하나님 은혜의 결과 였습니다. 교회의 독특성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더 이상 세상의 가치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갖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들에게 베풀고 나누어주기 위해 살아갑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자연스럽게 성도의 사랑의 교제에 힘쓰게 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섬기셨듯이,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자신의 것을 통해 다른 이를 섬기게 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초대교회 안에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교회가 부자만 회원으로 받은 것일까요? 어떻게 이러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34-35절에 그 비결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 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 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초대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있던 반면에 신분과 지위가 낮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자, 여유 있게 가진 자들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그 돈을 가지고 교회에 궁핍한 자들이 생길 때마다 계속해서 그들을 도왔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이 이렇게 자신의 소유를 팔아 다른 이들을 섬기는 모습은 일회적이거나 단회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나눔과 섬김은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타났습니다. 36-37절에 보니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전재산 밭을 다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에게 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통해 가난하고 힘든 성도들을 도왔습니다.
사실 이처럼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항상 가난한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해 주시며, 그들을 돕는 것이야말로 성도의 지극히 당연한 의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초대교회 안에는 고아와 과부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약자로서 스스로는 경제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고아와 과부는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고, 심지어 가난으로 인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굶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가운데 초대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자신들이 가진 모든 물건을 통용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자신들이 소유한 부동산을 처분하여 그 돈을 가지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이처럼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은 복음의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받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 곁에도 가난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늘 교회 안에는 여러모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 있고, 또한 여러모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가지고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어떻게 섬길 수 있겠습니까? 사도들의 발 앞에 자신의 모든 소유를 내려놓은 초대교회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받은 자로서 우리의 소유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사람들을 섬기고 돕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