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0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행전 4장 13-22절)

한국 서울 지하철에 타고 있는 한 남성에게 여자 손님이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아저씨, 이 기차 기름으로 가죠?” 너무 황당한 질문에 이 남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 세상에 지하철이 전기로 움직이지 무슨 기름으로 가나? 이런 황당한 사람을 보았나?’ 그래서 이 남자이 말했습니다. “아니요. 지하철은 기름으로 가지 않습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여성은 바로 다음 역에서 내렸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보며 혀를 차며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참, 세상에 별일이네. 다 큰 성인이 어떻게 지하철이 기름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할까?” 조금 전 일어난 일을 다시 생각하며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한 15분 정도 지나자 남자는 지하철 안내 방송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번에 내리실 역은 길음 길음 역입니다.” 남자는 그제서야 아까 그 여자 손님이 물어본 질문이 “길음역에 가느냐”고 물어본 것임을 알고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정보의 한계에 갇혀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길음역을 잘 몰랐던 이 남자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바가 전체인냥 행동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까?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의 모습이 예수님과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지식과 정보를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를 심문하고 있는 대제사장의 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분명 나사렛 예수는 단지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이단에 불과하며, 절대 메시아 일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무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면 이 모든 소요가 끝이 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난 줄 알았던 어느 날, 나사렛 예수를 따르던 수제자 베드로가 나타나 날마다 성전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다시 예수를 믿는 자들의 숫자가 남자만 5천명이 넘게 되자, 대제사장 무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제사장과 그의 무리는 당장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왔고 다음날 재판을 열었습니다.

대제사장 무리는 베드로와 요한을 이단으로 몰아가며,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부인하도록 엄중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협박과 살벌한 재판 분위기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기탄 없이 예수의 이름이 가진 능력으로 이 앉은뱅이가 일어났으며, 예수는 비록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3일만에 다시 부활하셨음을 증거했습니다.

이미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가 예수를 이단으로 결정내렸습니다. 따라서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또 다시 예수의 이름을 꺼낸 것은 목숨을 걸고 말한 것입니다. 대제사장 앞에서 변증을 하는 베드로는 구약성경을 줄줄 인용해 가며 예수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용기 있게 증거하자, 이들을 심문하던 자들은 더욱 깜짝 놀랐습니다. 병이 나은 앉은뱅이도 증인처럼 이 자리에 참석하고 있으니, 심문하는 자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친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시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 무리는 더 이상 민간에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가르침이 퍼지지 않도록 베드로와 요한을 협박했습니다. “더 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예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마시오.” 당시 이 종교재판을 진행한 자들은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판결을 어긴다는 것은 단순히 유대인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 협박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19-20절 말씀을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행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의 위협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공회가 결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베드로와 요한의 단도한 태도는 “결코 우리는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노라”라는 목숨을 건 대담한 도전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진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고작 산헤드린의 협박에 넘어가겠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는 부활하셨으며, 그의 이름에 능력이 있다.”는 자신들의 타협할 수 없는 부동한 입장을 공회 앞에 재천명하였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바를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이처럼 인간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가 충돌 하는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할 것인가? 아니면 큰 손해를 감수하고 예수를 따를 것인가?” 오늘 베드로와 요한의 이 신앙고백은 사람들 앞에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의 말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누구의 권위에 굴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위협과 핍박도 이겨내야 합니다.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려면, 베드로와 요한처럼 성령에 충만해야 합니다. 늘 우리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되신다는 진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말씀 속에서 예수를 보고,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말씀 속에서 보고 들은 예수를 언제 어디서나 용기 있게 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