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모든 인간이 한 사람도 예외 없는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본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죄로 인해 십자가와 같은 죽음의 형틀에 달려 죽어야 하는 사형수들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러운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었고, 죄의 형벌로 인해 이 세상에서도 고통받고 사단의 노예로 살아가다가, 죽어서도 뜨거운 지옥 불에 들어가 영원히 극악한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저주 받은 운명을 갖고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사형수인 우리들을 위하여 대신 죄의 형벌과 저주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밑에는 예수께서 흘리신 붉은 피가 땅에 고여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면 피가 마르게 되고, 온 몸에 수분이 사라짐으로 인해 탈수현상을 겪게 됩니다. 타는 듯한 목마름과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죽기 직전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이처럼 극악한 고통의 순간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겪고 계십니다.
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순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주님은 그 잔인한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기도는 우연히 나온 기도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이 특별한 순간, 주님의 전 생애를 바쳐 기도하며 준비해온 삶의 목적을 이 기도에 담으셨습니다. 주님의 첫 기도는 다음과 같은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그러나 여전히 주님은 하나님을 향해 친밀함을 담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와 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아가셨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이 신뢰를 깨트릴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우리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을 향해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대신 짊어 지시고 죄의 형벌과 저주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여” 소리 내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신 예수님, 과연 주님은 그 극악하고 잔인한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기도 하셨을까요? 주님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야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가신 목적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려 함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살기 위해 태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한 순간도 우리를 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한 순간도 주님의 사명에서 벗어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 불꽃 같은 인생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우리의 죄의 무게를 짊어지시고 죄의 저주와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눈 앞에 십자가를 그려봅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두 손목과 발목에 박힌 큰 못, 주님의 머리에 씌어진 바늘 같은 가시로 만들어진 월계관, 주님의 허리를 찌르고 깊게 들어가버린 창, 자신의 온 몸의 체중을 스스로 견뎌야 함에 따라 심장이 호흡이 가빠지며 괴로워하시는 주님… 예수께서 당하신 고통은 말로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처럼 고통스런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습니까?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지 약 2천여년이나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사시대 때와 같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신앙생활하며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삼십년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하면서도 진정한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베푸신 죄사함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없이 신앙생활 합니다.
그러나 이 어두운 영적 사사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 불꽃처럼 자신을 밝히며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숙된 경건과 연단된 꿋꿋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삶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늘 예수가 나를 위해 고난 당하셨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그 큰 고난 당하셨으니,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 안에 채우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편안한 길을 선택하지만, 예수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를 위해 죽을 것이라는 마음이 그들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안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십자가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정신이 우리의 삶에 깊이 박혀서, 예수 죽인 것을 우리가 짊어지고 간다면, 환경과 육신의 연약함을 핑계로 죄와 침륜과 빠지는 삶을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입으로 예수를 믿는다 말하면서도 삶으로는 여전히 죄를 끊어내지 못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아버지의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십자가는 악세서리로 목에 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내가 사랑하는 이 죄와 이 세상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늘 생각합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질 때,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죄로 인해 죽을 밖에 없는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흘리신 피로 구원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받히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간절하게 불렀던 장면을 기억하며, 이 귀한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죄사함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과 친밀함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