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불의의 사고로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가 있습니다. 그의 소원은 자기 힘으로 열 걸음만 제대로 걸어보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이 앉은뱅이가 사는 마을을 지나가던 한 의원이 우연한 기회에 환자를 진찰하게 되었습니다. 의원은 이 사람의 맥을 짚어 본 후 잠시 후 침을 놓아 주었습니다. 그리곤 약을 몇 첩 지어주고는 길을 떠났습니다. 2주 후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앉은뱅이는 자기 다리의 감각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경험이라 신기해 하던 그는 용기를 내서 자리에서 일어나 보았습니다.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이리저리 쓰러진 그는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드디어 스스로 서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아들의 목소리를 들은 어머니가 깜짝 놀라 부엌에서 달려옵니다. 그리고는 평생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아들이 스스로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밖에서 일하고 계신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어서 이 기쁜 소식을 아버지에게 알려 드려야겠다. 어머니는 가장 믿을 수 있는 하인을 보내 아버지에게 아들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한 걸음에 아버지가 일하는 곳으로 달려간 하인은 조금 전 일어난 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주인 어르신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자, 우리가 만약 이 아버지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내 아들녀석… 누구보다 아들의 다리상태는 아버지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 할리 없는 하인이 지금 나한태 “아드님이 걷고 계십니다!”하고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 아버지라면 어떻게 할까요? 만사를 재쳐놓고 집에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왜요? 사람은 아무리 그 소식이 기쁘고 즐거워도, 두 눈으로 직접 봐야 믿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아버지도 그랬을 꺼에요. 하인의 이야기를 듣고 “네 말이 정말이냐?”하고 묻고는 가슴이 쿵쿵거리며 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집에 가서 아들을 보기 전까지는 이 사건의 진실 여부를 100% 믿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요, 평생 아들 때문에 가슴에 비수를 꽂고 살았습니다. 자식이 스스로 인간 노릇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 아버지를 평생 아프게 했어요. 그러니까 이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걸을 수 있다는 것만큼 더 좋은 소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두 눈으로 믿기 전까지는 절대로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이라고 해도요, 그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소문을 귀로 들으면 눈으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본성은 신앙생활에서도 이어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않으면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증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이것은 동일한 현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30대 나사렛 출신의 청년 예수. 그가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 많은 사람들 앞에 출현했다는 소식은 온 로마제국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미 심장이 멈추고, 옆구리에 창을 찔리고 과다출혈로 사망한 지 3일이나 지난 자가 다시 살아난 단 말인가? 그게 말이나 되나?” 이성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말도 안되는 이 가르침 앞에 사람들은 혀를 차고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의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신기하게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 믿는 것은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과 지내면서 보고 듣고 가르침 받은 내용들을 글로 기록하였습니다. 그 책들이 바로 우리가 잘 하는 마태복음, 요한복음 입니다. 베드로의 제자로 알려진 마가도 그가 보고 듣고 배운 내용을 정리하여 마가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세 복음서가 나온 이후, 사도 바울과 선교여행을 같이 수행했던 동역자이자 의사 출신의 ‘누가’도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글로서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누가가 기록한 글이 바로 ‘누가복음’ 입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장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행 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행 1: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자, 1절에 “내가 먼저 쓴 글…”이 바로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을 말합니다. 1-2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가 먼저 쓴 글 즉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공생애 사건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사도행전은 누가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제자들과 사도 바울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3절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통을 당하신 이후 부활하신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행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곧 바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40일동안 이 땅에서 부활하신 몸으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저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친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분명 내 눈으로 죽은 것을 목격한 예수님이 다시 살아 나셔서 무려 40일 동안 함께 지내고 계시니, 제자들과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이들과 계속해서 함께하시지 않고, 이제 곧 승천하실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늘 예수님이 떠나시면 자기들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고 염려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이런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 즉 사도들을 한 자리에 모으시고 오늘 본문 4절에 기록된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여기 한글 성경은 ‘약속하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본래 이것은 ‘약속하신 선물’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약속하신 선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그것이 ‘성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승천하므로 제자들이 홀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도와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란 말이 중요합니다. 다르다는 말은 두 가지 경우에 쓰입니다. 첫째는 본질이 아예 다른 두 가지를 놓고 다르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사과와 오렌지는 다릅니다. 개와 고양이는 다릅니다. 이처럼 본질이 다르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둘째는 본질이 같지만 또 다른 것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친구가 사과를 먹으려는 것을 보고, “그 사과 내 사과니?”하고 물었을 때, “아니 이거 다른 사과야.”하고 말하빈다. 이처럼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다른 것을 의미할 때도 다르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사과와 오렌지가 다르다고 할 때처럼 본질적으로 자신과 다른 분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다른 분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듯이,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란 말은 한자로 풀이해보면, “은혜로 보호하시고 가르치시는 선생님”이란 뜻입니다. 영어로는 보혜사가, Counselor 혹은 Helper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은혜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실 것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약 열흘 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던 제자들 위에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약속대로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왜 중요할까요?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기로 하신 약속은 제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제다들을 가르치시고, 은혜로 보호하시고 도와주신 성령님은 지금 우리들과도 함께 하고 계십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과 40일 동안 마지막 시간을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그 귀한 40일 동안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누가는 오직 이 한 가지 사건, 성령님에 대한 사건만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성령의 오시는 일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제가 서두에 언급한 대로 사람들은 눈으로 본 것만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직접 두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도 못했는데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일까요? 바로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그 안에 성령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보호하시고 도와주셨던 성령은 오늘도 우리들을 가르치시고, 보호하시며,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늘 인식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시며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 바로 성령님 이셨습니다. 죄를 지어 성령하나님 을 근심케 하지 마시고,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