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에게는 4명의 남자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어린 남동생이 바로 유다 입니다.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는 본래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자신의 형 예수가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유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이 송두리째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둘로스)이 되어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유다가 어느 날 교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상한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사람들의 신앙고백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행하셨으므로 자신들은 율법의 요구대로 거룩히 살아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방탕하게 살아갔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은혜를 가지고 방탕하게 살아갔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괜찮아.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내 죄의 대가를 다 치르셨잖아? 더 이상 나는 내 죄와 아무 상관 없어.” 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방탕하게 죄를 즐기며 살아가라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 방탕하게 살던 탕자,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다시 집에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불쌍하게 여기고, 탕자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탕자가 아버지의 남은 재산을 가지고 또 다시 집 밖에 나가 예전처럼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그 남은 재산마저 탕진해 버린다면 어찌 그의 지난 회개가 진심일 수 있겠습니까? 탕자가 그렇게 산다면 그는 지난 날 아버지가 보여준 용서에 먹칠을 하는 것이며, 동시에 아버지에게 가장 큰 불효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 보아도 이러한 삶의 모습은 옳지 못합니다. 탕자가 만약 그러했다면 그는 정말 염치가 없고, 양심이 죽은 뻔뻔한 사람인 것이죠.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마음껏 죄를 지으며 방탕하게 살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의 노예가 되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은혜로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귀한 은혜를 받고도 또 다시 죄의 길에 돌아간다면 그 어찌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도 일부로 죄를 지으며 죄를 즐기며 사는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며, 주님의 은혜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이러한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는 이들에 대하여 실상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여기 4절에서 ‘가만히 들어왔다’는 것은 슬그머니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단들,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슬그머니 들어와서 교회를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은 이미 훗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로기록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보내주셨는데, 방탕하게 죄를 지으며 예수를 모욕했으니 어찌 그 죄가 작다고 하겠습니까? 아무리 그 사람이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 말해도 삶으로 예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은 자요, 예수님을 모욕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자들에 대해서 성도가 지켜야 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3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유 1: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여기 중간에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말씀 보이십니까? 유다가 기록한 이 말을 다시 풀이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귀한 백성에게 주신 믿음을 여러분이 굳게 지키십시오.” 3절에나오는 “힘써 싸우라”는 이 말은 본래 스포츠에서 쓰이는 단어 입니다. 레슬링 선수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상대편의 몸을 넘어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스포츠 경기를 보면 상대방이 골을 넣지 못하게 수비도 해야하고 동시에 상대편 골대에 골을 넣기 위해 공격도 해야 합니다.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라”는 말은 이단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 교회가 철저하게 방어하고 또한 그들의 거짓 가르침을 무너뜨리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진리를 수호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은 계속해서 진리의 말씀을 잘 배워야 합니다. 이단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얼마나 열심히 배우고 가르칩니까? 거짓 메시지요, 죽음에 이르는 교훈인데도 그렇게 열심히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배운 바를 토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단의 공격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은 더욱 더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진리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새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바쳐 베풀어 주신 귀한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를 헛되이 받고 죄를 즐기며 방탕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 가운데 없습니까? 이단들의 가르침처럼 “예수님 믿으니까 내 마음대로 죄 짓고 살아도 충분히 구원 받을 수 있어.”하고 잘 못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삶을 사는 자는 예수를 모욕하는 사람이요, 진리를 부인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다. 또한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살아가는 자들을 향해 진리로 힘써 싸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은혜에 감사하여 믿음의 도를 배워가고 힘써 지키며 위해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