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2 형제 사랑의 새 계명 (요한1서 2장 7-11절)

성경은 구약과 신약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 합 66권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929장, 신약성경은 260장으로 총 1189장입니다. 번역본에 따라 절수는 조금씩 달라집니다만, 대략 구약은 23090절, 신약은 7949절로 총 31039절 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은 참 깁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 성경을 한 단어로 정리해달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단어를 고르시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믿음’이란 단어를 골랐습니다. 어떤 분들은 ‘천국’이라 단어를 골랐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저에게 성경을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저는 주저없이 ‘사랑’이란 단어를 고르고 싶습니다.

성경은 사랑의 책입니다. 그토록 중요해 보이는 믿음이란 단어도 성경 전체에 약 250번 밖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사랑’이란 단어는 300번 넘게 사용되었습니다. 즉 믿음의 결론도 사랑입니다. 성경의 가장 핵심이라 불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랑의 책이며,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러브 스토리… 그리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과 이웃들을 사랑하는 러브 스토리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이라 불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사랑하는 그의 열두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셨던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베드로 너 성경 좀 더 열심히 읽어라.” “안드레 너 전도 좀 더 열심히 해라.” “야고보 너 요즘 기도가 많이 줄었구나. 산 기도 좀 다녀와라.” 주님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되리라.”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제자들에게 남기신 명령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사도’ 입니다. 초대 교회 많은 성도들이 사도 요한을 바라보며 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발견하고 참 ‘사랑이 많은 분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본래 그는 예수님 만나기 전에 갈릴리 바다에서 일하는 거친 뱃사람이었습니다. 요한과 그의 형 야고보는 과격한 성격을 가진 형제였습니다. 하루는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환영하기는커녕 자기들을 거부하자 이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쉽게 말하면 “예수님, 저 사마리아 사람들 위에 불벼락을 내려서 다 태워 죽이십시다.”하고 말한 것이죠. 이런 불과 같은 과격한 성질 때문에 예수님은 요한과 그의 형 야고보에게 ‘우뢰의 아들’ (The son of Thunder)란 뜻을 가진 헬라어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성격이 굉장히 급하고 불 같고 시끄러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시한폭탄처럼 언제 발끈하고 또 화를 낼지 모르는 다혈질이었습니다. 본래 형제 중 한 사람이 강하면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유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형제들은 둘 다 불같았습니다. 화 나면 앞 뒤 안보고 발끈하는 한 성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요한은 자존감이 낮아 시기와 질투도 많았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 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요한은 시기와 질투가 났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우리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아닌데 자기가 뭐라고 우리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가?” 요한은 그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사도 요한의 성격을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가 원하는대로 안되면 쉽게 화내고 남들 잘 되면 그거보고 배 아파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남들 보고 ‘욱’하던 성질도 사라졌습니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삶이 풀리지 않아도 깊은 바다처럼 평온하게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보다 남이 더 잘 되는 것을 보고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줄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만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던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천둥의 아들 요한을 사랑의 사도로 이렇게 변화시켰습니까?

 

어떻게 사도 요한이 이렇게 새로운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 세상에 무엇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돈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천만 금은을 갖고도 미성숙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 힘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습니까? 아니요. 강제적으로 바꾼 것은 껍데기만 바꿀 뿐 그의 내면의 본질은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무엇이 천둥의 아들 요한을 사랑의 사도로 바꾸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사도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날, 요한은 바로 그 십자가 앞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의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그 때부터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고 마치 자신의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후 요한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을 위해 교회 성도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무엇이 성격이 불 같고 자기밖에 몰랐던 요한을 이처럼 사랑의 사도로 변화시켰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요한이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를 보니, 교회 안에 교묘하게 들어온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머리로만 예수님을 알고, 그 비밀스러운 복음의 내용만 믿으면 된다”는 이상한 거짓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거짓 가르침 앞에 초대 교회는 어처구니 없게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단의 공격이었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신앙의 참 본질이 무엇인지 교회 성도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일 2: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왜 사도 요한이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까?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있기에 빛에 머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런 지식 자체가 우리에게 빛을 준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9절 말씀을 오늘날의 말투로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혼이 빛에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도 그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진짜 빛 가운데 있습니까?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일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빛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그 시작도 사랑이요 그 끝도 사랑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고, 원수를 용서하지 않고, 남이 나보다 잘 되는 꼴을 못보고 배 아파하고, 뒤에서 남에 대해 험담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 사람이 여전히 어둠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내 맘에 딱 맞아 들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서로 마음이 다릅니다. 평생을 살아온 부부도 다릅니다. 내가 낳은 자식도 나와 마음이 다릅니다. 그 누가 우리의 마음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기준으로 사람을 바라보면 좋아할만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래 성격이 불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다혈질에 시기와 질투심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괴팍한 성격을 가진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누구보다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고 이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계명을 다시금 우리들에게 새롭게 전해 주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빛 되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미움과 시기와 분노와 원망과 어둠을 다 몰아내 주셔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형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복된 주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