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1 순종으로 나타나는 앎 (요한1서 2장 1-6절)

어느 남학생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이 좋아하는 여학생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유심히 보게 됩니다. “저 아이는 김치찌개를 참 좋아하는구나? 생선 보다는 고기를 더 좋아하는구나?” 그 여학생이 평상시 옷을 입는 것을 보며 취향도 알게 됩니다. “화려한 옷보다는 심플하고 수수한 스타일을 좋아하는구나?” 이처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깊은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해 알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또한 반대로 상대방이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곱창이나 순대 같은 음식은 잘 못 먹는구나? 거짓말 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구나?”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아는 것에서 그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함께 김치찌개를 먹으러 가야지, 곱창 순대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거 먹으라고 권유하면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만 자꾸 행동한다면 그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백 번 말로 아내를 사랑한다고 해도, 아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전혀 관심도 없고 매일 아내가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한다면 그런 남편의 사랑 고백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죠. 머리로만 아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배려하고 섬겨주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입으로만 사랑할 뿐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내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1세기 교회 안에 교묘하게 들어온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은 거룩하여 구원받지만, 육신은 더러운 것이라서 썩고 없어질 것이기에 육신으로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삶으로는 음란하고 게으르고 세상 즐거움에 탐닉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 성도들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만 알고 믿으면 되. 그 다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 것 살아도 구원 받을 수 있어.” 얼마나 달콤한 유혹입니까? 사실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즐기지 못하는 세상 문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고 보니,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있고,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것’,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곳’들이 많습니다. 삶의 제약이 많아 보입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이 와서 “괜찮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달려 돌아가셨잖아? 그거 믿으면 다 구원 받는거야. 육신은 어차피 썩어 없어질거야. 너 하고 싶은대로 살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마시고, 가고 싶은 곳 다 가도 구원 받을 수 있어.” 영지주의자들이 이렇게 말하니까 이 달콤한 유혹에 성도들이 넘어가 하나 둘 픽픽 거룩한 신앙생활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결국 이러한 영주주의자들의 꾐에 넘어간 그리스도인들은 겉으로 보면 세상 사람이나 삶의 아무런 차이가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주일날 교회 다니는 것 하나 빼고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심지어 나중에 그가 교회 다닌다고 말하면, “교회 다녀?”하고 놀랄만큼 전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사는 Sunday Christian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명목적 크리스찬” (Nominal Christian) 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만 남고 그의 삶은 전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정말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처럼 하나님을 알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신 사실만 믿기만 하면, 나머지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 받는 것일까요? 사도 요한은 교회 안에 들어온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 쌓아가며, 삶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아무런 상관 없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악된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일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영지주의자들은 지식적인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고 반박했습니다. 4절 말씀을 이어서 보겠습니다. “(요일 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지식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도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하나님에 대한 책들을 수백 권 읽는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 알아.”하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지 않고 반대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 성경 지식이 가장 뛰어난 사람, 성경을 통째로 달달 외우다시피 정통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신약 27권중 12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을 기록하며 가장 많이 사용한 표현이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입니다. 영어로 “In Christ”, 헬라어로 “엔크리스토” 입니다. 성경에 정통했던 바울은 신앙의 핵심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영지주의자들의 말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 쌓아가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을까요? 오늘 그 해답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일 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들도 영지주의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알고 있는 지식을 구원을 얻는 자격증처럼 생각하고, 나머지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