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관계를 통해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 중 하나는.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찾는 것입니다. 친한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카페에 앉아 차 한잔을 시켜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등 그 사람과 함께 교제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삶에 큰 즐거움을 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만나면 웃음 꽃이 피어나고, 마음에 충만한 행복이 쌓이고, 헤어지고 나면 또 다시 보고픈 친구를 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상대편과 함께 교제를 나누며 행복을 느낍니다. 부모는 자녀와 교제하며 행복을 느끼고, 부부는 상대편 배우자를 통해 행복을 느낍니다. 신앙의 본질은 바로 이 교제의 행복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하면 종교적인 활동들을 많이 떠올리곤 합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오랜 시간 기도하고,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이런 이미지들이 신앙생활 그 자체인 것으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주님과 함께 깊은 교제를 누리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최고봉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시대 유명한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지주의로 불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머리 속 특별한 지식만 쌓으면 되는 것으로 잘 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달달 외우고,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지식만 있으면 구원 받는 것으로 착각 했던 했습니다. 그들은 머리로 알기만 하면 어떠한 삶을 살던지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영지주의자들은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는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는 육의 세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믿은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가르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게으르고 음란한 생활을 마음껏 탐닉하고 있었습니다. 극기야 점차 세력을 확대해간 영지주의자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인들을 마구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들은 육신을 더러운 것, 가치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온 것처럼 보일 뿐, 사실은 영적인 존재였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부인하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며 돌아가신 사건을 모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탄생은 교회의 근간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흔들기 위한 명백한 사단의 전략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인 요한은 교회에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신앙을 경계할 것에 대한 필요를 알리고자 우리가 함께 읽은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머리로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참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가까이 지내며 주님과 함께 교제를 누리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특별히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중 한 사람처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신 분임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글의 특징은 예수님을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혹시 요한복음 1장 1절을 암송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계신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거하신 분임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1장 1절을 보겠습니다.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1절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여기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이 생명의 말씀이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1절에 요한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이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것을 귀로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그 분을 직접 손으로 만져 보았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 요한이 이렇게 예수님을 감각적으로 경험한 것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것만 거룩하고 육적인 것은 더럽고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온 것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들의 거짓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2절에 그는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뭐했습니까? 보았습니다. 영적인 존재는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제자들이 눈으로 직접 주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3절에 이러한 특징이 다시 한 번 강조 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동안 주님과 함께 동거동락한 사람입니다. 육성을 통해 전해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고, 주님의 몸을 직접 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 아니라, 그가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귀로 들은 살아있는 복음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신이 인간의 몸을 입을 수 있는가?” “어떻게 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있는가?”하고 질문합니다. 사도 요한 당시 영지주의자들도 동일한 질문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참 되고 거짓 없는 진리임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귀로 들은 바, 눈으로 본 바, 그의 손으로 만져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도 요한은 신앙의 실체가 단순히 영적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과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참 신앙의 본질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3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사실과,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실을 믿기만 하면 그에게는 하나님과 참된 교제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이 복음을 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4절 말씀을 보니 그는 이러한 진리가 우리 서로의 기쁨을 충만케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허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발명해낸 허구의 인물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실체 시며, 참 진리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관념적으로, 지식적으로 아는 것으로 그치면 안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허상으로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실체이십니다.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삶이 가장 행복하고 복된 인생입니다. 우리 삶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주님께 순종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