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1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헌신 (느헤미야 12장 44-47절)

모세를 따라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오랜 세월 광야에서 살아가던 그들은 드디어 요단강 서편에 있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강 동편으로 돌아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목에는 이미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들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롭게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생활로 지쳐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고 영접하지 않은 모압과 암몬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내용이 신명기 23: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위대한 모세가 죽고 천년이 지난 이후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그들의 조상이 그토록 원하던 가나안 땅에서 무너진 성벽을 완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께 성벽 봉헌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서 13장 1절 말씀을 보니, 이 기념비적인 성벽 봉헌식에서 제사장은 때마침 이 날 읽은 구절이 바로 앞에서 말한 신명기 23장 3절을 읽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느 13:1)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느 13:2)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였는지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사장이나 레위인들도 먹고 살기 힘들어서 사역 다 내려놓고 다른 도시에서 농사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제사장이 신명기 말씀을 읽었을 때 백성들은 깜짝 놀랐고 곧 무리 가운데서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방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토요일 새벽예배 때 느헤미야 9장을 설교하면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이방여인과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아 가정을 이루고 있었을 때 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압 사람 암몬 사람 쫓아내고,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신속하게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느 13: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 3절을 보니까 백성들은 말씀에 순종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듣고 곧 말씀에 따라 이방인들을 모두 분리하였습니다. 단칼에 끊어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바로 준행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복된 사람입니다. 이방인 아내, 이방인과 낳은 자녀까지도 이스라엘 무리 가운데서 다 분리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방을 책임지고 담당하고 있는 제사장 엘리아십이 모압 사람 도비야를 위하여 성전의 큰 방을 내어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와서는 안되는 모압인 도비아가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의 중심에서 방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명백한 죄였습니다. 게다가 도비야가 지내고 있는 방은 원래는 제사와 레위인들을 위한 특별한 창고였습니다. 5절 말씀을 한 번 보겠습니다. “(느 13:5)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갖추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또 기명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성물과 제물 그리고 레위 사람들에게 줄 구별된 음식들을 저장해 두는 창고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고 가증하게 여기시는 모압 사람 도비야의 안방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제사장 엘리아십이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엘리아십은 레위인이고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그는 율법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모압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전 안에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또한 다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그 동안 이러한 사태를 방관한 것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무시되고 등한시 되어왔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가장 거룩하게 살아야하는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살았으니, 나머지 레위인들과 백성들의 삶은 오죽했겠습니까?

이 악한 일이 느헤미야에게도 보고 되었습니다.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느 13:7)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갖춘 악한 일을 안지라” 이 일에 대한 느헤미야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8절을 보니 “내가 심히 근심하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느헤미야가 소극적인 자세로 “이건 잘못된 것인데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하고 속으로 근심하며 궁리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본래 매우 큰 화를 낸 것입니다. 그러니 8절 말씀을 다시 해석하면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총회 안에 들어온 모압인 도비야에게 크게 화를 내며 그의 살림살이를 모두 밖으로 던져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그의 열심과 열정을 보게 됩니다. 이후 그는 이 방을 정결하게 하였습니다. 새롭게 청소하고 본래 이 방이 쓰여야 할 특별한 창고의 용도로 회복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압 사람으로 인해 더러워진 하나님의 성전이 다시 거룩하고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제사장 엘리아십이 성전에 모압 사람을 위한 방을 만들어 놓았듯이, 혹시 오늘 우리들도 마음의 성전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위한 방을 따로 만들어 놓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 방만큼은 건들지 마십시오. 여기는 내 구역입니다. 다른 방은 다 주님 가지셔도 이 방만큼은 모압 사람 도비야가 지내야 합니다.”하고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정리하지 못하는 마음 속 방은 없습니까? 하나님 거실도 쓰시고, 화장실도 쓰시고 부엌도 쓰십시오. 원하시면 제 서재도 쓰십시오. 그러나 제가 여가를 즐기는 저 방만큼은 안됩니다. 주님께서 그 비밀스런 문을 열고 들어가시려면, 그 앞을 가로 막고 화를 내며 “주님 다른 방은 다 들어가셔도 이 방만은 주님이라도 못 들어갑니다. 저 안의 도비야는 절대로 못 내 보냅니다.”하고 고집 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전 안에 모압 사람 도비야에게 방을 내준 제사장 엘리아십으로 말미암아, 온 성전이 더러워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세상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마음의 방, 마음의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가득한 세속적인 욕심과 생각, 탐욕과 세상적인 쾌락을 다 깨끗이 청소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과 마음들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에는 수많은 방이 다 있습니다. 혹시 곳간 열쇠는 내가 쥐고 아직도 주님께 못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다른 곳은 다 열려 있지만, 아직도 주님조차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내 삶의 특정한 영역은 없습니까? 우리의 모든 마음의 공간, 삶의 공간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의 빛으로 정결하게 정리하는 귀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