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30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인 헌신 (느헤미야 11장 1-2절)

예루살렘 도시는 바벨론과의 전쟁 이후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도시 전체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하여졌으며 모든 성벽은 무너져 내리고 불타 버렸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은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서히 폐허처럼 변하여 한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영광스런 도시가 말 그대로 버려진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약 150년 후, 어느 날 페르시아에서 왕을 섬기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그 문은 불타버렸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가슴에 안고 예루살렘 성에 오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난 150년 동안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성벽재건을 불과 52일만에 완성했습니다. 그는 성을 작게 세우지 않았습니다. 성벽을 크게 지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루살렘 성의 크기가 광대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거하는 백성의 수는 희소 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텅텅 비어 썰렁합니다.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하였으나 막상 그 예루살렘성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왜 페르시아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온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치안이 불안했습니다. 주위의 적군들이 시시탐탐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언제 또 불타 없어질지 모르는 위기에 놓인 도시였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 입장에서는 치안이 정말 중요합니다. 예루살렘 주변에는 호전적인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언제 기습을 받을지 모르는 전운이 감도는 도시이기에 불안해서 거주를 머뭇거렸다는 것입니다. 한국도 북한과의 연평도 교전사건이나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시험 같은 적의 도발과 위협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 때문에 외국 바이어들이나 투자업체들이 선뜻 한국이란 나라에 오지 못하는 사례와 유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치안이 불안한 예루살렘에 선뜻 이주하기 어려웠습니다. 미개척지인 예루살렘에 거주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위험한 일이었으며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예루살렘은 농사 짓기 좋은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농경 사회였기 때문에 뭐니 뭐니 해도 비옥한 토지를 가진 도시가 가장 으뜸으로 뽑혔습니다. 가장 농사 짓기 좋은 도시는 빵집이란 별명을 가진 베들레헴이나 기름지고 비옥한 땅을 자랑하는 헤브론 같은 주변 도시들이 바로 백성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루살렘이 일자리 많고 편의시설이 넉넉한 살기 좋은 도시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예루살렘 보다는 바로 옆에 있는 베들레헴이나 헤브론 같은 기름지고 풍성한 곡식과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도시로 이주를 했습니다.

셋째는, 그 성안에 들어가면 경제 활동을 마음대로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랍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어서 모든 생활이 성전 중심으로 진행 됩니다. 늘 제사와 예식이 있고, 많은 행사가 있고 규제가 많음으로 생활에 여러 가지 불편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장사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이주민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이주 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살기를 거부 했습니다. 성을 지어 놓았는데 백성이 없자, 이 문제를 놓고 한참을 고민하던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인구조사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인구조사를 토대로 이스라엘에 돌아온 귀환 자 중 십 분의 일을 제비 뽑아 예루살렘으로 이주 시키기로 결정합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 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그 구분은 다른 성읍에 거하게 하였으며.” 오늘 1절 말씀을 보니까 제비 뽑기 전에 이미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백성의 두목들입니다. 이 살기 힘들고 척박한 예루살렘 땅에 백성의 지도자들이 먼저 와서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예루살렘 성은 가옥이 없어 판자촌, 난민촌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곳곳에 풀만 무성하고 뱀이 기어 다니고 쥐가 들락날락 하는 이 성에 자원해서 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바로 이 백성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이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등대 같은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캄캄하고 어두운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백성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바로 이러한 지도자 이셨습니다. 그 분은 먼저 스스로 저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면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도자가 모범을 보이면 백성들은 기쁘게 따라갑니다. 지도자가 희생하면 따르는 자도 희생합니다. 그러면 고통이 축제가 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그 도시는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면 성도들이 그 모습을 보고 따라갑니다. 지도자의 희생 없이 백성의 희생이 있을 수 없었던 것처럼, 리더의 자리에 있는 자가 먼저 앞장서서 고통을 감수할 때 교회는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의 인품과 성숙도는 자기보다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가름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강제로 힘으로 백성들을 이주시키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백성만 고생하게 하고 자기들은 뒤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앞장 서서 힘들고 어려운 현장에 남아 예루살렘을 지켰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리더들이 넘쳐나는 교회 되시길 축복합니다.

두 번째 거주자들은 제비 뽑기에 의해 뽑힌 백성 십 분의 일 이었습니다. 1절 말씀 중간을 보면 “그 남은 백성은 제비를 뽑아 십 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비뽑기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져 왔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 사용한 방법이 바로 제비뽑기 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또 다른 열 두 번째 사도인 맛디아를 뽑을 때 사용한 방법도 제비뽑기 입니다. 이처럼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동일한 방법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들을 뽑고자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제비뽑기로 이주자를 결정했습니다. 즉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키지 않고 신앙적으로 감화시켰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거룩한 성이라고 언급하면서 그 곳에 사는 것이 복된 일임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에 아파트 당첨을 위해 번호표를 뽑듯이 제비뽑기를 실행한 것입니다. 이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정해진 방법이었습니다. (잠언 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그리하여 백성 중 10분의 1을 뽑게 되었습니다. 본래 이 백성들은 원래 예루살렘 밖에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비 뽑기에 뽑혀 삶의 터전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삶의 터전을 옮기는 문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은 정말 살기 힘든 도시였습니다. 치안도 불안하고, 경제활동도 보장되어 있지 않고 가옥도 다시 지어야 하고 불편한 것들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이들 다닐 학교도 별로 좋지 않고, 일자리도 변변찮고, 마트도 멀리 차 타고 가야 하는 그런 불편한 도시로 이사가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백성들은 말없이 제비뽑기 결과에 순복 하였습니다.  그들은 비록 자기들이 바라던 소원과 그들이 가진 의사와 일치하지 않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것이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고 철저하게 순복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비로소 그의 위대한 영적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백성들도 제비뽑기를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그 결과에 순복 했습니다. 제비에 뽑힌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거주지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의 것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말씀 하셨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고 그 뜻 앞에, 명백한 계시 앞에 아무런 불평 없이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본문에서 10분의 1을 제비 뽑았다는 것은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일할 재직을 뽑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선교사로 파송 받게 되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교육도 포기해야 하고, 안락한 가정의 삶도 포기해야 합니다. 직장도 포기해야 합니다.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하는 순간 포기할 게 너무 많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면 더 많은 시간을 내야 하고, 봉사도 남들보다 더 많이 해야 하고, 헌금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서도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오해를 많이 받고, 또 비난도 많이 받는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직분자를 세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선택” 때문입니다. 선택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선교사로 못나갑니다. 교회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직분은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내게 맡겨주신 것이지” 이런 소명의식 없이는 오래 사역할 수 없습니다.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은 조금만 힘든 일이 있어도 쉽게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소명의식이 아니라 억지로 사역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뭐 때문에 이 힘든 걸 하고 있나?”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 의지와 내 계획과 반대 되는 말씀을 하신다 할지라도 “왜 하필이면 나야?” 이런 불만 섞인 자세가 아니라, “그래 이것도 다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으시겠지” 하고 순종함과 신뢰함으로 나아가시는 성숙한 소명의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순종의 길을 걸어간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던 것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놀랍게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