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18 하나님께 쓰임받는 조건 (느헤미야 7장 1절)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마지막 단계인 문짝을 달자 길었던 성벽 건축 과정이 끝이 났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은 하나의 도시이자 성의 위치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백성들과 느헤미야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큰 역사를 마치고 나서, “이제 당분간 좀 쉬자” 하고 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한참일 때는 모두가 긴장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고 갑옷을 벗을 때 오히려 더 많은 사고가 발생합니다. 진짜 명장은 전투가 끝나고 갑옷을 벗는 그 순간부터 더 주의하여 경계태세를 유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느헤미야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성벽 재건이 끝난 이 순간에도 여전히 자신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단순히 성벽만 쌓으려고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했다면 그는 성벽 재건이 끝나자마자 편안한 페르시아 수산궁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느헤미야 에게는 또 다른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무너진 예배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성벽 재건을 마친 후 느헤미야는 가장 먼저 사람을 임명합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니 느헤미야는 어떤 자들을 세웠습니까? (7:1) “성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느헤미야는 “문지기, 노래하는 자들 레위 사람들을 임명했습니다. 이 직업들을 하나하나 살펴 봅시다. 먼저 그는 문지기를 세웠습니다. 문지기는 성의 문을 열고 닫는 일을 합니다. 문지기가 하찮은 직업 같아도요 그 성의 운명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입니다.

세계적인 건축물이자 중국의 자랑 만리장성. 그 높이가 무려 9m에 이르고 너비가 5m, 길이가 3000km나 됩니다. 이 성벽은 결코 뚫을 수 없는 말 그대로 철옹벽 입니다. 그런데 실제 중국 역사를 살펴 보면 도저히 뚫리지 않을 것이라 믿은 이 만리장성이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여러 번 뚫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철옹성이라 불리는 만리장성은 왜 뚫리게 되었을까요? 바로 만리장성을 지키는 문지기가 뇌물에 매수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높고 두터운 성벽이라 하여도, 문지기 한 사람이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자 그토록 튼튼한 철옹성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을 지키는 “문지기”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문지기 역할을 받고 불평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폼 나게 총독이나 장군 같이 멋진 직책을 주지? 문지기가 뭐야?” 만약 문지기가 이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찮게 여긴다면 그 성은 얼마 못 가 적군에 의해 뚫리게 될 것입니다. 교회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장로 안 시켜준다고 권사 안 시켜준다고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는 장로가 되려고 다니는 곳도 아니고 권사가 되려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기를 “문지기” 시켰다고 섭섭하다고 하며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일은 작은 일부터 시작됩니다. 작은 일을 성실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문지기의 사역을 맡겨 주셨다면 그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십시오. 꽃도 자라서 열매를 맺어야 더 큰 화분으로 옮겨주는 법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꽃이 피지 않고 열매가 없으면 그 꽃은 계속 그 화분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화분이 작다고 불평하지 마시고 있는 그곳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교회의 문지기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곳이 어느 곳이든지, 그 곳에서 문지기 사역을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맡은 바 사역에 최선을 다해 섬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교회 위에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문지기 외에 또 어떤 사람들을 세웠습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니 그는 노래하는 자들을 세웠습니다. 노래하는 자들을 세웠다는 것을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찬양대를 세웠다는 말입니다. 느헤미야는 경배와 찬양팀을 세웠습니다. 또 레위인들을 세웠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일하고 제사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외부로는 적들의 침공의 위협 속에 있으며, 내부로는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오늘 4절 말씀 후반절을 보면, 이들 중에는 아직 자기 집도 짓지 못한 사람들도 수두룩 했습니다. 즉 오늘날로 말하면 일해서 매달 Payment 내고 집 모기지 내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삶이 여유 있고 풍족한 자들이 아니라, 반대로 가난하고 빈궁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때에, 느헤미야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 즉 노래하는 자들을 세웠습니다. 또 레위인들 즉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자들을 세웠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느헤미야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삶이 조금만 힘들어져도 예배의 자리를 포기합니다. “목사님 요즘 너무 힘들어서 제 삶이 조금 나아지면 그 때 예배하러 교회 가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서가 잘 못된 것입니다. 삶이 회복 되야 예배가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회복 되어야 우리의 삶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왜 예배하는 자의 삶에 놀라운 회복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장 20절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때,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놀라운 회복을 주십니다.느헤미야 역시 힘들고 배고픈 시절을 보내고 있는 백성들을 하나님께 노래하는 자들 즉 “예배자”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백성들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자기의 모든 삶을 헌신하였습니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곳에 있던 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우리 삶의 가장 중심자리에 두시기 바랍니다. 또한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예배의 회복이 있을 때 우리 삶의 진정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