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12 형제 사랑의 도리 (느헤미야 5장 1-5절)

외부적인 문제가 마무리 되면 상당한 경우 곧이어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실례로,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후에는 다시 남과 북으로 갈라져 내전을 겪게 되었습니다. 또힌 일본의 통치를 벗어난 한국 역시 남과 북으로 갈라져 숱한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역사가 증명해 주듯이 외적인 문제가 마무리 되면 그 이후에는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느헤미야도 동일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아가 일으키는 외부적인 문제를 해결하자, 이제는 느헤미야에게 내부적인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그가 겪은 내부적인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5:1)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에게 찾아와 억울한 사연을 토로합니다. 무슨 연고인가 살펴보니, 흉년이 들어 먹을 식량이 부족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페르시아 왕에게 낼 세금이 부족해서 백성들이 빚을 지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보니,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백성들이 밭도 팔고, 포도원도 팔고, 집도 팔게 됩니다. 여기서 ‘밭’은 먹을 것. ‘포도원’은 마실 것, 집은 ‘잠자는 곳’을 의미합니다. 지금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당장 오늘 먹을 식량이 없어서 자신들의 기본 생계수단이 되는 것들을 팔고 있습니다. 현재의 생존을 위해 꿈과 미래가 담긴 ‘밭’과 ‘포도원’ 그리고 ‘집’까지 다 팔았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도저히 해결될 가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이 총체적 난관을 해결코자 백성들은 자기 자녀들을 종으로 파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딸 가운데는 이미 상당수가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아무도 이들을 구원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상황은 이처럼 심각해져만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백성들이 느헤미야에게 원망의 소리는 내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의 고통의 이유를 살펴보니, 고위관직에 앉은 자들이 ‘고리대금’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같은 이스라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돈과 양식을 꾸어주고 그 대가로 높은 이자를 취하여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백성은 더 가난하여졌지만, 귀인과 민장은 더 부하여졌습니다. 극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예루살렘에 나타났습니다.

돈을 꾸어주는 행위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돈이나 양식 또는 가축도 빌려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율법에서 무려 5번이나 동족끼리는 이자를 취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동족에게 이자를 취했고, 그것도 이자율이 높은 ‘고리대금’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행위는 명백한 죄였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자기의 생계도 뒤로하고 매일 새벽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성벽 재건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힘들게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변 적들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고, 치안을 강화하여 백성들이 평안하게 거하고 살면서 그들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앞장 서야 할 리더들이 오히려 백성들의 재산과 자녀들을 탈취하여 고리대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배와 주머니만 채우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것을 “공동체의식의 부재”라고 진단합니다. 귀인과 민장들, 곧 그들의 리더들은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안타깝게도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옛말에 “순망치한”이라 했습니다. 입술이 없으면 뭐가 시려요? 이가 시립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둘 중에 하나가 망하거나 불행해지면 결국에는 다른 한쪽도 그렇게 됩니다. 백성들의 불행이 결국에는 자신들의 불행이 될 것이라는 불 보는 뻔한 사실을 그들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은, 나만 복 받고, 나만 은혜 받고, 나만 잘 되면 되는 게 아닙니다. 내 옆에 있는 분이 불행하면 결국 나도 불행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을 내서 내 주변에 함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혹시 아프신 분은 없을까? 저 아무개 집사님 마음이 힘들거나 괴로운 거 같은데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뭐 없을까?” 나만 잘 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함께 더불어 잘 되는 것이 진짜 잘 되는 길입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가 우리 일상의 작은 현장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큰 역사는 언제나 작은 일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이 필요한 이에게 전화하고 안부를 묻는 것. 작은 일 같지만 그것은 큰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과 위로를 가져다 줍니까? 아마 먼 곳에 가족이 있으신 분들은 한 통의 전화가 얼마나 반가울 수 있을지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전화 온다는 것. 참 반갑고 행복한 일입니다. 전화로 목소리만 들어도요, 마음이 따뜻해 집니다. 우리가 전화로 누군가의 이야기만 들어줘도요. 그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주변의 형제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성도로서 당연히 해야하는 일입니다. 형제의 고난을 이용해 재산을 증식한 귀인과 민장들은 책망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 주변에 삶이 힘들어 아파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저들의 아픔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도 ‘공동체의식이 부재’하여 “나만 잘 되면 되지”하고 생각하지 않고 주변의 형제들을 사랑으로 돕고 섬겨야 합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아무리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여도, 옆에 형제가 헐벗고 양식이 없는데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 완성 됩니다. 오늘 이 하루 주변의 형제 자매들을 볼보고 또 그들을 섬기실 수 있는 귀한 하루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