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06 무너진 성벽을 쌓은 사람들 (느헤미야 3장 5-20절)

5절 말씀에 드고아 귀족들이 등장합니다. 드고아의 귀족들은 성벽 재건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 성벽이 재건 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안정된 삶에 만족해 힘든 일을 거부하고 있는 거죠. 영적 안일주의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안해도 먹고 살만하니까 성벽 재건하는데 땀흘리고 열심을 낼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이들은 귀족이란 신분 때문에 먼지 날리는 공사현장에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 같은 귀족이 왜 그런 궂은 일까지 해야 해?’ 드고아 귀족들은 특권의식과 권위주의를 내려놓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사회생활 하다 보면 이런 특권의식과 권위주의를 가진 사람들을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무언가 작은 일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아니, 내가 누군데 이런 걸 해? 내가 이런 커피 심부름이나 하려고, 사무실 쓰레기통이나 비우려고 취직한 줄 알아? 내가 어떤 대학 나온 사람인데 지금 이런 일이나 시켜” 하며 이들은 뭔가 작은 일들이 주어졌을 때 화를 내는 사람들이입니다. 드고아 귀족들도 자기 신분에 맞는 어울리는 일들이 주어지기를 바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에 작은 일 큰일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오직 그 일을 대하는 사람의 작은 마음과 큰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코너스톤 교회는 큰 일을 작은 마음으로 하려고 하지 마시고 내게 맡겨진 작은 일들도 큰 마음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내게 조그마한 일들을 시켜도 “내가 누군데 그런 일을 해? 딴 사람 시켜” 하는 자세가 아니라 ‘네, 저 같은 부족한 사람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감사와 겸손한 자세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는 리더들의 특권의식과 영적 권위주의를 주의하여야 합니다. ‘아니 내가 목산데, 아니 내가 장로인데 아니 내가 안수집사인데’ 하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래, 내가 목사니까 섬겨야지, 그래, 내가 장로니까 섬겨야지, 그래, 내가 안수집사니까 섬겨야지..’하고 겸손하게 섬기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드고아에 살던 평민들은 다 땀 흘려가며 예루살렘 성벽 재건하는데 이에 반해 드고아 귀족들은 일하지 않습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군대 안가고 병역기피자들 입니다. 이처럼 특권의식과 권위주의에 빠져 살아가던 드고아 귀족이 있었지만 또 반대로 겸손하게 자기의 기득권을 내려놓은 특권층들도 있었습니다. 8-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3:8) “그 다음은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 등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향품 장사 하나냐 등이 중수하되 저희가 예루살렘 넓은 성벽까지 하였고 (3:9)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후르의 아들 르바야가 중수하였고” 먼저 8절에 보니까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 향품 장사 하나냐가 등장합니다. 금장색은 반지, 귀걸이 팔찌 같은 악세사리를 향품 장사는 향수를 파는 사람입니다. 당시에 이들은 왕족과 귀족들을 대상으로 거래하는 상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오늘날로 따지면 명품 브랜드샵 메니저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죠. 한 마디로 잘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술자들은 대우 받는 거죠. 그러니 이들도 성벽 재건 안 해도 충분히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누구보다 먼저 나와 뜨거운 태양 아래 무거운 벽돌을 나르며 일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았습니다. 9절에 등장하는 르바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후르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르바야는 오늘날로 쉽게 말하면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예루살렘 절반을 다스리는 사람이니까 얼마나 집안이 빵빵 했겠습니까? 아버지 말 한마디면 병역기피 충분히 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르바야는 자기가 가진 특권의식 다 내려놓고 지금 막노동 공사판에 뛰어드는 거죠. 교회 안에는 금장색, 향품 장사 같은 부자도 있고요, 르바야와 같은 좋은 가문 출신의 특권층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8-9절에 나오는 이들처럼 비록 자신이 사회 상위 계층이요, 부자요, 특권층이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섬기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예루살렘의 리더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주님의 일들을 이뤄가십니다.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14) “분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14절에 나오는 분문은 쉽게 말하면 ‘거름 문’입니다. 즉 오물과 온갖 더럽고 냄새 나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것들이 버려지는 문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사람들이 다 눈에 띄는 자리 ‘양문’ 같은 영광스러운 곳에서 작업하는 것을 더 선호할 것입니다. 뭔가 의미 있잖아요. 그런데 이 ‘분문’ 거름 문은 사실 모두가 작업하기를 꺼리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이 문을 누가 고칩니까?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 다른 번역본을 보면 ‘통치자 말기야’라고 나옵니다. 즉 한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 영주였던 통치자 말기야가 가장 더러운 문을 고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를 청소해도 사람들이 더러운 곳은 잘 안 하려고 합니다. 힘 안들이고 섬기는 일은 자원하는 사람이 많은데, 힘들고 땀 흘리는 일, 손 더러워지는 일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냄새 나고 더럽고 힘든 일을 좋아해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에 통치자인 말기야가 ‘분문’을 건축합니다. 어찌 보면 말기야는 성벽 건축 중 가장 냄새나고 더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을 자원해서 하고 있는 거죠. 드고아의 귀족들처럼 ‘내가 누군인데! 다른 사람 시켜!’ 하는 특권의식과 영적 권위주의에 사로 잡혀 사는 삶이 아니라,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해도, 가장 먼저 앞장 서 하나님을 위해 몸을 굽혀 섬기시는 진정한 리더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성벽을 재건하는 사람들은 다 자기 주머니에 있는 사비를 지불하고 일하는 사람들 입니다. 누가 열심히 일한다고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알아주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만약 이 사람들이 총독 느헤미야를 위해서 이 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으로 섬겼을까요? 이들이 기쁘게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느헤미야를 섬겼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들과 똑같은 성벽을 재건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 것이지요. 우리 코너스톤 성도 여러분도 교회 사역을 하실 때요 사람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무리 겉으로는 사람이 시켜서 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 마음은 여전히 주님을 위해 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20절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3:20) “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 3장 전체는 성을 짓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절에 딱 한 번 기록된 단어가 있습니다. 여러분, 3장 20절 중반에 ‘힘써’라는 단어 보이세요? 느헤미야 3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성벽을 재건 했습니다만 ‘힘써’라는 단어는 오직 바룩 한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그가 특별한 열심으로 성벽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힘써’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뜨겁게 되다.’ ‘불을 붙이다.’는 뜻이 있습니다. 쉽게 이해하면 우리말에 ‘열정’이란 말과 비슷합니다. 열정의 ‘열’이란 한자가 따뜻하다 태우다란 뜻이 있습니다. 즉 바룩은 성벽을 짓는데 남들과 다른 열정을 가지고 일했음을 보여줍니다. 똑같은 교회 일을 해도요. 남들과 뭔가 다른 열정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2배 3배 더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의 그런 열정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거에요. 우리가 대충대충 교회 일하면 아무도 모를 것 같죠? 그러나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다는 거에요. 반대로 우리가 열심히 일해도 아무도 안 알아주는 것 같아 섭섭할 때가 있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힘써’ 일하고 있는 지 그 모습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럼 예루살렘 성벽은 바룩 같은 열정 있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지어집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룩이 아무리 열정이 뛰어나도 그와 함께 옆에서 성벽을 쌓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 3장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다름 아닌 ‘그 다음은’이라는 표현입니다. 아무개가 성벽을 짓고 그 다음은 누가 짓고 또 그 다음은 누가 짓고 또 그 다음은… 이렇게 성벽재건은 릴레이 육상경기처럼 여러 사람이 함께 해야 합니다. ‘나 한 사람 쯤이야’하는 마음이 경기를 망치게 됩니다.

느헤미야 3장에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사람들의 이름들이 하나도 빠짐 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특별하게 새기고 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줄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헌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책에서 우리가 이름을 알 수 없는 딱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성벽을 짓지 않았던 ‘드고아의 귀족들’만은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시길 바랍니다. 주 안에서 우리의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열심으로 일하고 있는 모든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의 수고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백성들이 각자 맡은 구역을 주님을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쌓아 올린 것처럼, 오늘 내게 맡겨주신 사역들을 주님을 위해 기쁨과 감사로 섬기시는 코너스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