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05 가장 먼저 성벽을 쌓은 사람들 (느헤미야 3장 1절)

오늘 본문 말씀에 가장 먼저 성벽 재건을 시작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니 그들은 다름 아닌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 형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영적 리더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목사님들이죠. 흙먼지 날리고, 땀내 나는 성벽 재건 현장에 영적 리더들이 가장 앞장서고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중학교 시절에 다니던 교회가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만 되면 온 교회 중고등부, 청년부들이 함께 교회 건축 현장에 나와서 흙을 나르고 벽돌을 날랐습니다. 그 때 교회 부목사님으로 계시던 목사님께서 정말 앞장서서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무거운 벽돌을 등에 이시고 계단을 올라가시고, 삽을 들고 흙은 퍼 나르며 구슬 땀 흘리며 일했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목사님이 앞장 서서 일하시니까 청년들, 중고등부 학생들도 더 한 마음으로 함께 교회 건축에 앞장 섰습니다. 누구하나 투덜거리는 사람 없이 힘든 내색 하지 않고 정말 기쁘게 함께 일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이스라엘에서 최고 어르신입니다. 직위로 보아도 그 보다 높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런 대제사장이 손수 팔 걷어 붙이고 벽돌 나르고 흙 나르니까 어떻게 됩니까? 백성들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교회도 리더들이 헌신하고 앞장 설 때, 뒤에 있는 사람들이 따라 옵니다. 한 공동체의 수준과 힘은 그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리더에 의해 좌우 됩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는 보스가 아니라, 섬기는 리더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수만 마디의 화려한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리더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절 말씀을 보니 그들이 함께 일어나 제일 먼저 지은 것이 무슨 문입니까? 바로 ‘양문’입니다. ‘The sheep Gate’ 말 그대로 양들이 오고 가는 문입니다. 양문은 예루살렘 성벽의 북동쪽 모퉁이에 위치한 문으로, 특별히 모압 지방에서 들어오는 희생 제물들이 이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문 바로 옆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데스다 연못이 있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 쓰이던 희생 제물들인 양과 염소가 이 베데스다 연못에서 씻기 운 후 양문을 통과하여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지요. 즉 무너진 양문을 재건한다는 것은 무너진 제사를 회복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무너진 예배를 다시 세우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 프로젝트라는 대역사를 시작하는 현장에서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 형제 제사장들이 가장 먼저 ‘양문’을 건축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예배를 회복하는데 가장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다 한들 예배가 무너져 있으면 알맹이 없이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식당 인태리어가 아무리 최고급일지라도 음식 맛이 없으면 어느 손님이 그 식당 단골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볼품 없어 보이는 집도 요리가 맛있으면 손님들이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그 이유는 식당의 본질, 그것은 음식의 맛이기 때문이죠.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새로 성전을 건축하고 지붕도 고치고 벽에 페인트도 새로 칠하고 바닥도 고치고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청소한다고 해도 예배가 무너져 있으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최고급 브랜드 차를 구입해도 엔진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듯이,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 되도 예배의 회복 없이는 그 의미가 무색해지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벽의 재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과제가 바로 예배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나의 예배생활에 무너져 내린 것은 없는지 늘 스스로 돌이켜보고 점검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본문을 보면서 아니 “양문이 뭐 대수라고 가장 먼저 짓지?”, “그 보다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문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삶에서 예배를 최우선으로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인간이 이 지구 상에서 하는 모든 행위 중 가장 영적 임팩트가 가장 큰 시간이 바로 예배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일상의 현장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이 예배의 시간에는 더욱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삶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배가 새워지면 그 사람의 삶도 따라 세워집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이지요. 제사장들이 가장 먼저 양문을 세운 이유도 예배에 대한 최우선순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을 보니까 양문을 건축하여 문짝을 달기 전에 무엇 했다고 나와 있습니까? 성별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들은 땀 흘리며 못질하며 만든 문을 ‘성별’ 합니다. 이들은 지금 단순히 성문을 건축하여 문짝을 다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즉 예배 시간에 나와서 기도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일상 가운데 예배를 준비하는 행위도 예배 안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대표 기도를 담당한 집사님이 한 주간 삶에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 그것이 예배지요. 찬양대가 예배에서 찬양 한 곡을 부르기 위해 정성을 다해 연습하는 그 시간도 예배입니다. 설교자가 말씀을 읽고 분석하고 자료를 찾고 준비하는 그 시간도 예배입니다. 교회에 일찍 나와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 엄밀히 말하면 그 준비 시간도 예배가 됩니다. 현대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주일 아침에 모여 한 시간 동안 갖는 시간만을 예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벽돌을 나르고 나무를 잘라 양문을 세우고 못질하고 경첩을 달고 문짝을 다는 그 행위가 주님을 위해 거룩하게 성별 될 때 그것이 곧 삶의 예배가 되는 것이지요. 성벽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와 관련 된 양문을 가장 먼저 세웠듯이, 가장 먼저 우리 삶 속에 무너진 예배의 양문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1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들이 ‘양문’을 만들고 또 성벽을 건축하는데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짓습니까?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건축합니다. 망대는 적들이 쳐들어 오는지 보기 위해 설치하는 ’Watch tower’ 입니다. 즉 벽돌을 쌓아 건축하는 성벽과는 다르게 짓기 어려운 건축물입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이 가장 어려운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거죠. 이들은 제사 드리는 자기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성벽 재건 프로젝트에 참여하였고 거기서도 가장 어려운 일들을 자기들이 맡아서 하고 있는 거죠. 사실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들은 풀 타임 사역자들입니다. 6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영적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사 드리는 일만 하려고 해도 하루 종일 분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바쁘다고 핑계되면서 성벽 재건 현장에 오지 않을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소임만 다하고 끝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옷 소매를 걷어 부치고 양문을 건설하고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가장 건축하기 어려운 망대를 건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리더들이 앞장서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부분을 감당함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